항목 ID | GC009012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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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漢陽趙氏 |
영어음역 | Hanyang Jossi |
영어의미역 | Hanyang Jo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보라동|지곡동|수지구 상현동|처인구 역북동 |
집필자 | 홍순석 |
세거지 |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영문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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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성촌 |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보라동|지곡동|용인시 수지구 상현동|용인시 처인구 역북동 |
입향시기/연도 | 15세기 중반 |
성씨시조 | 조지수(趙之壽) |
입향시조 | 조육(趙育) |
[정의]
조지수를 시조로 하고 조육을 입향조로 하는 경기도 용인시 세거 성씨.
[연원]
한양조씨의 시조는 고려 때 첨의중서사를 지낸 조지수이다. 한양조씨 가문에서는 조선 개국공신이 2명이 배출되었는데, 태조 때 이조판서를 지낸 조인옥(趙仁沃)과 태종 때 찬성사를 지낸 조온(趙溫)이다. 한양조씨 가운데서 가장 번창하였던 가문은 판도판서 조인벽(趙仁璧)의 아들 4형제의 후손이다.
중종 때 형조판서를 지내고 청백리에 오른 조원기, 중추부판사를 지낸 조혜(趙惠), 인조 때 대제학·이조판서 등을 지내고 『일본기행(日本紀行)』을 지은 조경(趙絅), 현종과 숙종 때 명필로 이름 있던 조위명(趙威明) 등이 그들이다. 그 밖에 헌종 때 문장과 시의 천재로 알려진 조수삼(趙秀三)과 그의 손자로 초상화에 뛰어난 화가 조중묵(趙重黙)이 있다.
[입향경위]
한양조씨는 조선 개국 이래 양주 일대에서 세거하였는데, 15세기 중반 이후 용인 지역에 입향하였다. 조온의 아들 조육(趙育)이 용인 지역의 토성 사족이었던 용인이씨 이백찬(李伯撰)의 딸과 혼인한 것이 계기가 되어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에 입향하게 되었다.
또 조온의 동생인 조사(趙師)가 정몽주의 묘역 가까이에 장사지낼 것을 유언하여 그에 따라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영문리에 묘소를 조성하고 아들 조맹발(趙孟發)이 시묘했으며, 손자 조승원(趙承源)이 영문리에 토착하던 신씨와 결혼하면서 정착하게 된 것이다.
[현황]
수지구 상현동에 입향한 조육 이후 8세손 조충손(趙衷孫), 9세손 조원상(趙元常), 조원기(趙元紀), 10세손 조광조(趙光祖) 등 3대에 걸쳐 지속적으로 과거 합격자를 배출하여 가문의 성세를 누렸다.
특히 조광조·조광보·조광좌의 후손들은 수지구 상현동의 세거지를 중심으로 기흥구 보라동·지곡동, 처인구 역북동 등지에 분산하여 집성촌을 형성하였다. 조사의 후손들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영문리, 역북동 음터골에 별도로 세거지를 형성하여 지금까지 살고 있다.
[관련유적]
유적으로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에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호인 심곡서원, 경기도 기념물 제169호인 조광조 묘역이 있으며,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지곡동에 용인시 향토유적 제50호인 사은정이 있고,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에 조사 사당 및 묘역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