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18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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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致福孝子旌閭閣 |
영어음역 | Kim Chibok Hyoja Jeongnyeogak |
영어의미역 | Monument Shrine for the Filial Piety of Kim Chibok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완장리 매능동 645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양윤식 |
성격 | 정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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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 민도리 맞배집 |
건립시기/일시 | 1831년[초창]|1992년[중창] |
정면칸수 | 2칸 |
측면칸수 | 1칸 |
소재지 주소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완장리 매능동 645 |
소유자 | 의성김씨 종중 |
[정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완장리 매능동에 있는 조선 후기 효자 김치복의 정려각.
[개설]
김치복 효자정려각(金致福 孝子旌閭閣)은 조선 후기인 1831년(순조 31)에 명정된 김치복 효자정려문부터 1860년(철종 11)에 명정된 권씨 효부정려문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의성김씨 일문에서 나온 효자·열녀·효부인 김치복 효자정려문, 황씨 열녀정려문, 권씨 효부정려문, 조씨 효부정려문 등을 한 곳에 모신 것을 말한다. 『해동삼강실록(海東三綱實錄)』에 이들 정려문이 세워진 내력이 실려 있다.
1675년(숙종 2)에 태어난 김치복은 부모를 극진히 섬기고 상을 당하여 행실이 돈독하므로, 사림이 다투어 천거하여 1831년에 정려되어 진위에 정문을 세웠다가 현재 위치인 용인 완장동으로 옮겼다. 열녀 황씨(黃氏)의 본관은 상주(尙州)로, 1696년에 태어났다. 김치복의 아들 김수로(金洙老)의 처로, 지아비가 죽자 일체의 음식을 끊고 7일 만에 남편을 따라 순절하였다. 이러한 열부의 행실이 조정에 알려져 1831년에 열녀정문이 내려졌다.
효부 조씨(趙氏)의 본관은 양주(楊州)로, 1737년에 태어났다. 김치복의 손자인 김달명(金達命)의 처로, 남편과 함께 시부모를 극진히 모셨다. 상을 당해서는 음식을 가려먹으며 효성으로 삼년상을 치렀다. 이러한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1852년(철종 3)에 효부정문이 내려졌다. 효부 권씨(權氏)의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1767년에 태어났다. 김치복의 증손인 김유성(金維城)의 처로, 시아버지의 병환이 위중하자 지극한 정성으로 기도하여 그 병을 낫게 하여 지극한 효성이 조정에 알려져 1860년에 효부정문이 내려졌다.
[위치]
김치복 효자정려각은 지방도 82호선으로 남곡초등학교 부근에서 남북으로 흐르는 완장천을 따라 완장리로 올라가다 보면 매능동 서쪽 산구릉에 위치하고 있다.
[변천]
김치복 효자정려각은 원래 진위에 있었던 것을 이곳으로 이전한 것인데, 2002년 3월에 후손들이 다시 처음 정문이 세워졌던 곳으로 이전하여 현재는 건물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종도리 장여에 기록된 상량문을 보면, 1954년 이곳으로 이축하면서 1차 중수하였고, 현존 건물은 1992년에 2차로 중수된 것을 알 수 있다.
[형태]
현재의 정려각은 정면 2칸, 측면 1칸 규모인데, 측면과 후면 벽체는 현대식 적벽돌로 쌓았고, 맞배로 구성한 지붕에는 시멘트 양식 기와를 얹어 옛 모습을 잃었다. 측면의 방풍판도 본래의 형식에서 벗어나 허식으로 흘렀다. 본래의 건물은 덤벙주초 위에 두리기둥을 세운 정면 2칸, 측면 1칸의 전통 골기와 지붕이었으나 새롭게 고쳐 지으면서 현재와 같이 변모되었다.
간살 구성은 내부의 정려문 숫자를 고려하여 비교적 넓게 잡았는데, 특히 전면 칸은 보통의 정려각에 비해 넓게 잡혔다. 전면은 중방을 들이고 상하를 홍살로 막았다. 내부의 측면과 후면에는 각 칸마다 정려문 편액이 걸려 있는데, 동측 벽에 황씨 열녀정려문, 후벽 동측부터 김치복 효자정려문·조씨 효부정려문, 서측 벽에 권씨 효부정려문이 차례로 배치되었다.
[현황]
정려문 편액은 2002년에 원래 정문이 세워졌던 평택시로 이전되고, 빈 정려각만 남아 있다.
[의의와 평가]
조선 후기 정려각의 형식을 따르고 있는 소박한 건물이었으나, 중수를 거치면서 본래의 모습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