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19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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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深谷書院講堂記 |
영어음역 | Simgok Seowon Gangdanggi |
영어의미역 | The Record of Lecture Hall of Simgok Confucian Academy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홍순석 |
성격 | 기문(記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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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송시열(宋時烈)[1607~1689] |
창작연도/발표연도 | 1673년(현종 16) |
[정의]
1673년(현종 16) 송시열이 심곡서원 강당 건축을 기념하여 지은 기문.
[개설]
「심곡서원 강당기(深谷書院 講堂記)」는 정암 조광조(趙光祖)[1482~1519]의 5세손인 조위수(趙渭叟)가 심곡서원의 강당을 건축하고 난 뒤 송시열(宋時烈)[1607~1689]에게 글을 청하자 지어 준 기문(記文)이다. 심곡서원 강당에 현판으로 걸려 있다. 심곡서원은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에 있는 조선시대 서원으로, 조광조를 봉안한 곳이다. 조선 중기 효종 때 사액되었다.
[내용]
기문 서두에서 우리나라 도학의 계통을 열거하고, 정암 조광조의 학덕을 기린 다음, 김굉필(金宏弼)과의 일화를 서술하였다.
"조종에서 이미 문묘에 종사하였으니, 그 은덕을 갚음이 극진하였고, 지방 유생들이 또 묘소의 곁에다가 사당을 세워 신주(神主)를 모셨지만, 강당은 미처 지을 겨를이 없었다. 그뒤에 유생과 관리들이 또 의견을 모으고 물자를 마련, 정유년 가을에 착공하여 무술년 봄에 준공하였으니, 글 읽고 휴식할 처소가 그래서 대략 갖춰진 것이다. 선생의 5세손, 지금 삼산부사(三山府使)로 있는 위수(渭叟)군이 제생(諸生)들을 위해 나에게 기문을 요구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선생이, 우리 동방에 태어난 것은 마치 염계(濂溪)가 송(宋)나라에 태어난 것과 같다. 어찌 반드시 구슬을 꿰는 것처럼 차서 있게 주고받은 다음이라야 도학을 전하는 것이겠는가? 무릇 후인으로서 이 강당에 오르는 자가 한갖 선생의 용색과 성음만을 상상할 게 아니라, 모름지기 선생의 배운 바는, 가까이는 정주(程朱)의 정맥(正脈)을 으뜸으로 하고, 위로는 수사(洙泗)의 묘지(妙旨)를 구함에 불과했다는 것을 강구할 뿐이다. 말만을 앞세우고 듣는 것만을 숭상함으로써 명예를 위하고 실속이 없는 것은 진실로 선생의 깊이 부끄러워한 바인데, 더구나 헛된 외면 치레만 하는 문장의 익힘에랴?"
[의의와 평가]
「심곡서원 강당기」는 심곡서원 강당이 준공되기까지의 경위뿐만 아니라, 정암 조광조의 학통과 스승 김굉필의 일화, 송시열의 도학사상 등을 가늠할 수 있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