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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653
한자 楊州 檜巖寺址 禪覺王師碑
이칭/별칭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분야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산7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이도남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377년연표보기 -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건립
건립 시기/일시 1999년 8월연표보기 -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모조비 건립
이전 시기/일시 1997년 3월연표보기 -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산불로 훼손되어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이전
보수|복원 시기/일시 1997년 3월~2000년연표보기 -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연구실에서 약 3년간 보존 처리 과정을 거쳐 복원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320년 - 나옹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376년 - 나옹 사망
문화재 지정 일시 1963년 9월 2일연표보기 -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보물 제387호로 지정
관련 사항 시기/일시 2011년 현재연표보기 - 복원된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조계사 중앙불교박물관에 보관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7년 3월연표보기 -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산불로 인해 훼손
현 소재지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산7 N37° 51′ 04.1606″, E127° 06′ 17.9675″지도보기
성격 비석
관련 인물 나옹(儺翁)
재질 화강암
크기(높이, 너비, 두께) 315㎝[높이]|106㎝[너비]|22㎝[두께]
문화재 지정 번호 보물 제387호

[정의]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에 있는 고려 후기 선각왕사(禪覺王師) 나옹(儺翁)의 부도.

[개설]

나옹[1320~1376]은 1344년(충혜왕 복위 5) 회암사(檜巖寺)로 들어가 불교에 입문하였다. 1358년(공민왕 7) 원나라에서 돌아와 왕의 부름을 사양하고, 구월산과 금강산 등에서 은거하다가 회암사로 다시 돌아와 절을 크게 새로 지어 올렸다. 1376년(우왕 2) 경기도 여주 신륵사(神勒寺)에서 57세로 입적할 때까지 불법만을 행하였으며, 입적한 후 시호를 선각(禪覺)이라 하였다.

[건립 경위]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楊州檜巖寺址禪覺王師碑)나옹이 죽은 이듬해인 1377년(우왕 3) 건립되었다. 1997년 3월 천보산에서 발생한 산불로 인해 보호 비각이 불타면서 비석 역시 심하게 파손됨에 따라,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연구실로 옮겨 약 3년간 보존 처리 과정을 거쳐 복원되었다. 복원된 비는 경기도박물관을 거쳐 현재 조계사(曹溪寺)의 중앙불교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1999년 8월 원래의 부도비를 대신해 그 자리에 모조 부도비를 세워 놓았다.

[위치]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는 현재의 회암사 왼편 산등성이에서 북쪽으로 50m 지점에 남향하여 서 있다. 나옹선사 부도 및 석등은 반대편인 회암사 오른편 산등성이 능선 제일 윗부분에 자리한다.

[형태]

거북 모양의 받침돌[귀부]은 조각 수법이 많이 간략화 되어 있으나, 비 몸돌 윗부분의 뿔 달린 용 두 마리는 용트림하듯 매우 정교하고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비의 양식은 당나라의 비 형식을 따랐으며, 특이한 것은 비의 몸돌과 머릿돌인 이수가 별개의 돌이 아니라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규모는 전체 높이가 315㎝, 너비가 106㎝, 두께가 22㎝이고, 이수 부분 높이는 82㎝이다. 거북 받침은 높이 71㎝, 가로 171㎝, 세로 222㎝이며, 비석 받침은 높이 16㎝, 폭 124㎝, 두께 50㎝이다.

[금석문]

비문은 이색(李穡)이 짓고, 권중화(權仲和)가 예서로 썼으며 전액도 권중화가 썼다. 나옹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현황]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는 1963년 9월 2일 보물 제387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조계사 경내에 위치한 중앙불교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거북 받침은 훼손 당시의 처참한 광경 그대로 현장에 방치되어 있으며, 원래 비가 서 있던 자리에 모조 부도비가 세워져 있다. 복원된 비는 추후 회암사지 박물관이 개관되면 다시 돌아올 예정이다.

[의의와 평가]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건립 당시는 중국에서도 원나라와 명나라를 통틀어 예서가 쓰이지 않았던 때였기에, 당시 우리나라의 예서 연구 수준을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동국금석평(東國金石評)』에서 “나옹 비는 팔분서(八分書)인데, 매우 정리가 잘되어 있지만 신비로운 글씨체는 아니다”라고 평하였으나, 결구(結句)도 엄정하고 필력도 씩씩하고 굳세어 예법을 깊이 터득한 것으로서, 중국의 『희평석경(熹平石經)』을 방불케 하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