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0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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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西厓集 |
영어음역 | Seoaejip |
영어의미역 | Seoaejip Anthology |
이칭/별칭 | 『서애선생문집(西厓先生文集)』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황만기 |
성격 | 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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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인물 | 류성룡(柳成龍, 1542~1607)|류진(柳袗) |
저자 | 류성룡(柳成龍, 1542~1607) |
간행자 | 류진(柳袗) |
간행연도/일시 | 1633년 |
권수 | 20권 |
책수 | 10책 |
사용활자 | 목판본 |
가로 | 17.2㎝ |
세로 | 21㎝ |
표제 | 西厓先生文集 |
간행처 | 해인사(海印寺) |
소장처 | 안동대학교 도서관 |
소장처 주소 | 경상북도 안동시 송천동 388[경동로 1375] |
[정의]
1633년에 간행된 안동 출신 류성룡의 시문집.
[편찬/발간경위]
『서애집(西厓集)』은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이 죽은 지 27년 만인 1633년(인조 11)에 막내아들 수암 류진(柳袗)이 합천군수로 있을 때 해인사(海印寺)에서 간행하였다. 그 후 1958년에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초간본을 대본으로 영인하였고, 1991년에는 서애선생기념사업회에서 중간본과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영모각(永慕閣)에 소장되어 있는 초고본 등을 모두 모아 『서애전서(西厓全書)』를 간행하였다.
[서지적 상황]
저본은 안동대학교 도서관 소장본이다.
[형태]
20권 10책의 목판본으로 표제는 서애선생문집(西厓先生文集)이다. 행자(行字)는 10행 20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크기는 가로 17.2㎝, 세로 21㎝이다. 어미는 상하이엽화문어미(上下二葉花紋魚尾)이다.
[구성/내용]
이조참의 이민구(李敏求)의 서(序)와 예조참의 이준(李埈)·장현광(張顯光)의 발문이 있다. 문인 정경세(鄭經世)가 서애행장(西厓行狀)에서, “평생 지은 시문(詩文)이 임진병화(壬辰兵禍) 때 없어졌으며, 이제 문집 10권과 『신종록(愼終錄)』·『영모록(永慕錄)』·『징비록(懲毖錄)』 등이 집에 보관되고 있다”고 한 것을 보면 이 책에 실은 시문은 그가 지은 것 중의 일부이며, 많은 시문이 임진왜란 때 소진되었거나 없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본집 권1·2에 시 220여 수, 권3에 주문(奏文) 4편, 소 4편, 권4에 소 7편, 권5에 차(箚) 8편, 권6에 서장(書狀) 25편, 권9에 정문(呈文) 5편, 서(書) 13편, 권10~12에 서(書) 139편, 권13~16에 잡저로 「독사기측(讀史起測)」·「상장질의(喪葬質疑)」·「전수기의십조(戰守機宜十條)」·「북변헌책의(北邊獻策議)」·「공물작미의(貢物作米議)」·「심유격구통사왜국의(沈遊擊求通事倭國議)」·「책문삼수(策問三首)」 등 127편, 권17에 서(序) 6편, 기 3편, 논 3편, 발 6편, 권18에 발 29편, 전(箋) 1편, 명 2편, 권19에 제문 10편, 비갈 9편, 권20에 묘지 9편, 행장 4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권1·2는 류성룡의 연보이고, 권3은 부록으로, 행장·교서·국왕치제문(國王致祭文)·동궁치제문(東宮致祭文)·병산서원 봉안문·상향축문·남계서원 봉안문·도남서원 봉안문 등과 만사 19편이 게재되어 있다. 권6에서 주목할 것은 1593년 2월에 올린 「진진휼기민사의장(陳賑恤飢民事宜狀)」과 그해 3월에 올린 「논군량민식장(論軍糧民食狀)」으로, 왜병이 서울을 철수한 뒤 도성민의 굶주림에 관한 참상과 진구대책(賑救對策) 등을 개진하였다.
류성룡은 명나라 원병이 평양으로 퇴각한 뒤 그들이 다시 진격해 올 것에 대비한 군량미의 조치와 함경도 지방의 성지(城池) 보수와 호령(號令)의 통일, 병기의 조치, 그리고 공을 세운 사람이라면 양반은 물론, 천인에 이르기까지 상을 주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때에 양인(良人)은 1급(級) 이상, 서얼은 2급, 공사천(公私賤)은 3급을 참수하면 모두 허과(許科)하도록 하며, 공명고신첩(空明告身帖)을 원수부(元帥府)에 보내되 전공(戰功)의 진위(眞僞)를 철저히 조사해 발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의병 중에도 처음에는 공로가 컸으나 그 뒤 이득을 주기보다는 폐단을 끼치는 자도 있으니, 그들의 공로가 있고 없음을 가려서 공이 있는 자는 상을 주고 공이 없는 자는 다른 의병에 소속시키게 하면, 얼마 안 가서 의병은 모두 관군이 되어 군령(軍令)이 통일되고 민폐도 줄어들게 될 것임을 제시하였다.
권9의 서(書)에서는 명나라 경리(經理) 송응창(宋應昌) 등 명나라 장수들과 주고받은 많은 서신들이다. 임진왜란 중 조선과 명나라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권14의 잡저 중에 「공물작미의」에서는 공물을 미곡으로 납부토록 하여 백성의 어려움도 덜고 국가의 쓰임도 풍족하게 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권16의 「중강개시(中江開市)」에서는 진구(賑救)의 대책으로 ‘중강개시’를 주장해 중국의 미곡이 조선에 들어옴으로써 평안도 백성뿐 아니라 서울의 굶주리는 사람들까지도 구제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의의와 평가]
『서애집』은 류성룡이 지은 『징비록』과 함께 임진왜란사를 연구하는 데 모두가 중요한 자료들이다. 이중에 「진시무차(陳時務箚)」에서는 명나라가 원병을 보내왔지만 그들이 우리를 구한다는 것을 궁극적으로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니, 우리가 요해처(要害處)를 택해 굳게 지키도록 하되 백성들로 하여금 유사시에는 들어가서 지키게 하고 무사할 때는 나와서 경작하게 하면 왜병이 진격해 와도 얻을 것이 없을 것이다.
또한, 퇴각해도 그곳에 우리 군사가 있어서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니 오래지 않아서 적은 스스로 물러갈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무엇보다도 백성을 안정시키는 데 중점을 두는 것이 급선무이며, 그러한 뒤에 백성을 훈련시켜 적을 막도록 함이 현명한 계책이며, 연강(沿江)에 보(堡)를 설치하고 각 도의 방수 계획을 세우는 것이 곧 적을 퇴치하는 방책임을 강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