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203 |
---|---|
한자 | 權宏 |
영어음역 | Gwon Goeng |
이칭/별칭 | 인보(仁甫),진봉(震峰)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이상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주부 |
성격 | 유생 |
---|---|
출신지 |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이상리 |
성별 | 남 |
생년 | 1575년(선조 8) |
몰년 | 1652년(효종 3) |
본관 | 안동 |
[정의]
조선 중기 안동 출신의 유생.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인보(仁甫), 호는 진봉(震峰). 아버지는 권대기(權大器), 어머니는 곡강배씨(曲江裵氏)이다. 형은 권우(權宇)이다.
[활동사항]
권굉은 안동부(安東府) 와룡면(臥龍面) 이계리(伊溪里, 현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이상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형이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학덕이 높았다. 이에 어려서부터 부형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뒤에 권춘란(權春蘭)의 문인이 되었다. 정묘호란 때 강화도로 왕실을 호종하여 소무원종공신(昭武原從功臣), 영사원종공신(寧社原從功臣)에 녹훈되고 별제(別提)로 승진하였으나 병으로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630년 동궁부솔(東宮副率)이 되고 1633년 영릉참봉(英陵參奉)이 되었으나 곧 사임하였다.
병자호란 때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자 시를 지어 국가의 운명을 개탄하고 태백산 진봉(震峰) 아래 임하댐의 건설로 이미 수몰된 길안면 용계리의 도연폭포가 있는 곳에 들어가서 띠집을 짓고 ‘와룡초당(臥龍草堂)’이라 이름한 뒤 초당 앞에 작은 단을 쌓아 ‘대명오(大明塢)’라 하고 대나무를 심어 굳은 절개를 표하였다. 병자호란 이후 대명의리를 주장한 안동 지역의 학자이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진봉일고(震峰逸稿)』 2권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