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2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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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奉祖 |
영어음역 | Gim Bongjo |
이칭/별칭 | 효백(孝伯),학호(鶴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황만기 |
[정의]
조선 전기 안동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
[가계]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효백(孝伯). 호는 학호(鶴湖). 아버지는 김대현(金大賢),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충의위 이찬금(李纘金)의 딸이다.
[활동사항]
김봉조는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과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01년(선조 34)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13년(광해군 5)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사도시직장에 임명되었으며 성균관전적, 사헌부감찰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단성현감으로 재임 중 선정을 베풀어 고을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경상도도사, 익산군수, 예조정랑을 거쳐 사헌부지평, 성균관직강이 되었으며 제용감정(濟用監正)에 승진되었다.
김봉조는 향리에서도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먼저 아버지 김대현의 명을 받아 임진왜란 때 전소된 오미동(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종가를 중건하고 영주에서 다시 오미동으로 이주하여 허백당 문중의 종손으로서 자제들의 교양과 문중 제사에 각별한 애정을 쏟았다. 또 1611년(광해군 3) 정인홍(鄭仁弘)이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을 무고하자 정인홍을 규탄하는 상소의 소수(疏首)로 추대되어 다섯 차례에 걸쳐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병산서원(屛山書院) 창건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 당시 풍산현(豊山縣) 유림에서 관리하던 풍악서당(豊岳書堂)의 모든 재산을 병산서원 소유로 이전하여 1613년 병산서원을 완공하였으며, 많은 후학들을 배양하도록 하였다. 1619년 안동 여강서원(廬江書院)의 동주로서 임천서원(臨川書院)과 병산서원에 각기 따로 모셔진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과 류성룡의 위패를 여강서원에 합향(合享)하는 일을 추진하였다.
김봉조는 문장에 조예가 깊어 동생 김영조(金榮祖)와 함께 영남에서 문명(文名)을 떨쳤다. 또 아우 김영조와 의리를 강마하고 수암(修巖) 류진(柳袗), 계암(溪巖) 김령(金坽), 매원(梅園) 김광계(金光繼) 등과 도의로 사귀었다. 학문적 성취가 높아 류성룡은 『퇴계집(退溪集)』의 요지를 정리하자고 제안하였으며, 정구는 경전의 뜻을 묻기 위해 무흘정사(武屹精舍)까지 찾아온 김봉조의 학문적 열의를 크게 칭찬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학호집(鶴湖集)』 3권이 있다.
[상훈과 추모]
영천(榮川)의 구호서원(鷗湖書阮)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