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2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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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富弼 |
영어음역 | Gim Bupil |
이칭/별칭 | 언우(彦遇),후조당(後彫堂),문순(文純),오천칠군자(烏川七君子)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황만기 |
성격 | 유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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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
성별 | 남 |
생년 | 1516년(중종 11) |
몰년 | 1577년(선조 10) |
본관 | 광산 |
[정의]
조선 중기 안동 출신의 유생.
[가계]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신중(愼仲), 호는 후조당(後彫堂). 아버지는 대사헌 김연(金緣), 어머니는 창녕조씨(昌寧曺氏)로 조치당(曺致唐)의 딸이다. 동생이 김부의(金富儀)이다.
[활동사항]
김부필은 안동부 예안현(현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동생 김부의과 함께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37년(중종 32)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유학하면서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하였다. 1556년(명종 11) 41세의 나이로 다시 이황에게 가 제자로서의 예를 올렸으며 여러 차례 벼슬이 내렸지만 사양하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이에 이황이 “후조주인(後彫主人)은 깨끗한 절개를 굳게 지켜 임명장이 문전에 이르러도 기뻐하지 않는구나……”라는 시를 지어 김부필의 지조와 절개를 높이 평가하였다.
1570년 이황이 역동서원(易東書院)을 건립할 때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같은 해 이황이 세상을 떠나자 소의(素衣)·소대(素帶)·소식(素食)하며 심상(心喪) 1년을 행하였다. 1574년 조목(趙穆)과 함께 도산서원(陶山書院) 건립을 주도하였다. 김부필은 구봉령(具鳳齡), 권호문(權好文), 조목 등 동문들과 두루 교유하였으며 학문과 행실로서 사림들 사이에 신망이 높았다. 아우 김부의, 사촌 형 김부인(金富仁), 사촌 아우 김부신(金富信)·김부륜(金富倫), 고종 금응훈(琴應壎)·금응협(琴應夾)과 한 동네에 살면서 학문을 토론하고 덕업을 권장하여 향리에서 ‘오천칠군자(烏川七君子)’라 칭송되었다.
[학문과 사상]
김부필은 평소 효제(孝悌)를 학문의 근본으로 삼았으며 일생 『심경(心經)』을 애독하였다고 한다. 퇴계 문하에 입문하고 나서 견해가 더욱 밝아지고 정밀해졌는데 당시 가장 힘을 기울여 공부한 것은 바로 『심경부주(心經附註)』였다. 눈을 감고 바로 앉아 마음속으로 깊이 체험하고 깨달은 바가 있으면 먹는 것도 잊을 정도로 빠져들었고 의문 나는 점이 있으면 이황에게 나아가 질의하였다. 심학(心學)에 관한 한 상당한 수준에 도달하여 이황도 김부필의 견해를 인정했다는 증거는 여러 문헌에서 나타나고 있다. 특히 『심경차록(心經箚錄)』에 잘 나타나 있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후조당집(後彫堂集)』이 있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안동시 금학산(金鶴山)에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순(文純)이며, 1822년(순조 22)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예안의 낙천사(洛川祠)에 위패가 봉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