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5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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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權五卨 |
영어음역 | Gwon Oseol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강윤정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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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 |
성별 | 남 |
생년 | 1897년 |
몰년 | 1930년 |
본관 | 안동 |
[정의]
일제강점기 안동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1897년(고종 35) 안동권씨 동성 마을인 풍천면 가곡리에서 권술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일이라고 불리는 이 마을은 15세기 초 권항(權恒)이 입향한 이래 안동권씨 동성 마을을 형성하였다. 묘소는 가일마을 뒷산 공동묘지에 있다.
[활동사항]
권오설은 가숙(家塾)인 남명학교와 하회 동화학교(東華學校)에서 수학하고, 대구에 이어 서울로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가세가 어려워 학업을 지속할 수 없었다. 1918년 전라남도청의 고용원으로 근무하다가 1919년 광주 3·1 만세 시위에 참가하여 옥고를 치렀다. 1919년 고향으로 돌아오자마자 11월 원흥학술강습소(元興學術講習所)를 조직하여 교장 겸 교사로 활동하였다. 또한 농민조합과 청년회를 조직하여 애국 계몽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 풍산소작인회, 화성회, 화요회, 조선노동자총동맹에 가입하여 서울과 안동을 오가며 농민·노동운동을 전개하였다.
1925년 4월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가하여, 4월 18일에는 조선공산당(제1차당)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또 같은 날 조선노농총동맹 대표로 고려공산청년회 조직에 참석하여 고려공산청년회 7인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및 조직부 책임자가 되었다. 같은 해 12월 중순에는 제2차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및 조직부 책임자로 선출되었다. 1926년 5월 6·10만세운동을 추진하다 사건의 전모가 발각되어 6월 7일 검거되었다. 1927년 9월 13일 공판이 열려 1928년 2월 14일 7년형을 언도받고 복역 중 1930년 4월 17일 옥사하였다.
[상훈과 추모]
2001년 권오설선생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가 조직되어 같은 해 11월 11일 가일마을 입구에 권오설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