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15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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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題詠 |
영어의미역 | Traditional Poetry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정소 |
[정의]
경기도 안산 지역을 소재로 하여 조선시대 문인·학자들이 지은 시(詩).
[개설]
옛 사람들은 안산의 아름다운 형승(形勝)을 “바다 위에 떠 있는 한 떨기 갓 피어난 연꽃”에 비유했다. 서쪽 바닷가의 해빈(海濱)에 맞닿아 마치 쫙 펼쳐 놓은 부채꼴 속의 한 송이 연꽃 같은 모습이라는 얘기다. 이런 자연적 경관을 배경으로, 특히 조선시대에는 수많은 학자와 시인들이 안산에 기거하며 주옥같은 시편들을 남겼다.
[작품 경향 및 작가]
조선시대 안산 지역을 제영으로 한 시 중에 특히 눈에 띄는 것이 수암봉 밑, 멀리 바닷가에서 새로 옮겨 조영(造營)된 안산관아와 객관의 빼어난 절경을 노래한 것들이다. 정이오(鄭以吾)[1347~1434]를 필두로 이원(李原)[1368~1429]·박원형(朴元亨)[1411~1469]·서거정(徐居正)[1420~1488]·강희맹(姜希孟)[1424~1483] 같은 문단의 대수(大手)들이 앞 다투어 남긴 좋은 시들이 그것이다. 조선 후기로 들어오면 유성룡(柳成龍)[1542~1607]·김류(金瑬)[1571~1648]·홍명원(洪命元)[1573~1623]·장유(張維)[1587~1638]·허목(許穆)[1595~1682]·이명한(李明漢)[1595~1645]·채유후(蔡裕後)[1599~1660]와 같은 대제학을 지낸 명인들이, 안산 지역 풍물과 인정을 노래한 많은 시를 썼다.
안산의 풍정(風情)과 아름다움을 노래한 빼어난 작품들이 대거 쏟아져 나온 시기는 1700년대를 전후한 조선 후기였다. 이는 안산 지역이 조선 후기의 새로운 학문과 문화예술운동의 중심 지역으로 떠오른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즉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1649~1736]의 양명학과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의 실학, 그리고 영조의 명에 의하여 『산림경제(山林經濟)』를 증보한 약은(藥隱) 유중림(柳重臨)[1705~1771]의 의학과 실학이 안산을 본거지로 뿌리 내렸다.
한편 문학과 예술은 이용휴(李用休)[1708~1782]·안정복(安鼎福)[1712~1791]·강세황(姜世晃)[1713~1791]·유경종(柳慶種)[1714~1784] 등 안산에서 세거(世居)하거나, 이익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은 인사들 가운데 출중한 문예적 취향을 지닌 15명의 학사들, 즉 ‘안산 15학사’들에 의하여 주도되어 수많은 시편과 그림·글씨들이 창작되었다. 이때가 명실공이 안산의 르네상스로 불려도 좋을 만큼 시와 예술에서 풍성한 수확을 거둔 시기였다.
[대표 작품]
동지수비수(動止誰非數)[가다 서다 하는 길을 누가 알 건가]
천한필마행(天寒匹馬行)[차가운 하늘 아래 필마(匹馬)로 가네]
독래허경(獨來虛暻)[텅 빈 객관에 홀로 든 저녁 무렵]
단비주인정(端費主人情)[오로지 주인의 인정뿐일세]
고벽잔등냉(古壁殘燈冷)[오래 된 벽엔 새벽까지 호롱불만 가물대고]
공량투서명(空樑鬪鼠鳴)[빈 대들보 위엔 쥐들의 싸우는 아우성]
자유지(自有地)[옛사람 가꾸지 않는 땅 대물림하듯]
부필강모영(不必强謀營)[다시 지을 생각은 아주 없다네]
「안산객사(安山客舍)」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이름난 천재 시인 중 한 사람인 고옥(古玉) 정작[1533~1603]의 시로, 『북창고옥선생시집(北窓古玉先生詩集)』에 실려 있다.
보국심유재(報國心猶在)[나라 은혜 보답할 마음 오히려 아직도 살아 있건만]
광시력부모(匡時力不謀)[시국을 바로잡을 계책은 부족하기만 하구나]
일년남우북(一年南又北)[1년 동안 남과 북 헤매 다녀도]
만사병겸우(萬事病兼憂)[모든 일 풀리지 않고 걱정만 쌓이네]
방초장하안(芳草長河岸)[꽃과 풀은 긴 시냇가 언덕을 덮고]
사양고역루(斜陽古驛樓)[옛 역사(驛舍)에는 석양이 비꼈는데]
비풍기천래(悲風起天來)[슬픈 바람만 하늘에서 불어오니]
입마고지유(立馬故遲留)[말에 오른 채 짐짓 가던 길 지체하네]
위 시 「안산도중유감(安山途中有感)」은 유성룡의 『서애집(西厓集)』권1에 실려 있는 시로서, 유성룡이 경기도를 순행할 때 썼다고 한다.
냉운표설략전산(冷雲飄雪掠前山)[찬바람 눈보라 앞산을 때리고]
일미간신재객간(一味艱辛在客間)[간난과 신고 끝에 객관에 들었네]
하처우의모옥리(何處牛衣茅屋裏)[어디라 띠집 속 소덕석이라도 덮고]
폐창조일부지한(閉窓朝日不知寒)[창 닫고 아침을 맞으면 추위쯤은 잊으리]
「안산동헌운(安山東軒韻)」은 임진왜란 당시 대제학을 지냈던 졸옹(拙翁) 홍성민(洪聖民)[1536~1594]의 시다. 임진왜란 후의 참상을 그리고 있다.
소옥규모착(小屋規模窄)[조그만 오두막집 비좁기만 한데]
포도만체(葡萄漫替)[포도넝쿨은 처마 끝까지 얽혀 있네]
환동유소실(還同有巢室)[돌아온 제비도 제 집인 양 하고]
부요하실렴(不要夏實簾)[한여름에도 대발은 필요 없게 되었구나]
장서공전재(障暑功全在)[더위를 막아 주는 것 모두가 너의 공]
상신미갱무(嘗新味更無)[신선한 그 맛 또한 다시 없구나]
천추무황엽(千秋武皇葉)[오래고 긴 세월 시들지도 않는 잎새]
여택차편첨(餘澤此偏添)[늙은이 여생에 혜택을 베푸네]
「안산의 작은 집에 포도넝쿨을 올리는 사다리를 만들고[安山小軒以葡萄作架]」는 해봉(海峯) 홍명원(洪命元)[1573~1623]이 남긴 시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곳에서 한 그루 포도나무에 기대어 새로운 삶에 대한 의지를 담고 있다.
만무홍표곡람전(慢舞紅飄曲欖前)[느릿한 춤사위와 휘날리는 옷소매 난간 위를 휩쓰네]
옥주인사해(玉酒人似海)[옥같이 맑은 술에 훈훈히 취했는데 술통은 바다 같고]
하향침좌엽여선(荷香侵座葉如船)[만좌에 스며드는 연꽃 향기 연엽선(蓮葉船) 같구나]
전성부유전성자(專城父有專城子)[아버지와 아들 모두 성주(城主)를 지냈는데]
주수교휘수석변(朱綬交輝壽席邊)[붉은 인끈, 휘황한 빛이 잔치 자리를 빛내 주네]
위 시는 김응조(金應祖)[1587~1667]가 당시 안산 현감인 이제두(李齊杜)[1626~1687]가 개최한 수연(壽宴)에서 지은 작품으로 『학사집(鶴沙集)』에 실려 있다.
고오엽락우처처(高梧葉落雨凄凄)[오동잎 가을 찬 비에 쓸쓸히 흩날리고]
새로삼천몽역미(塞路三千夢亦迷)[북새(北塞)길 멀고 먼 삼천 리, 꿈마저 뒤숭숭]
욕향정인기소식(欲向征人寄消息)[나랏일 위해 떠난 사람께 소식 전하려니]
일행서우만행제(一行書又萬行啼)[사연 한 줄에 눈물은 만 가닥]
위 시는 안산 사람으로 인조반정 1등공신이며 대제학과 영의정을 지내면서 문명을 드날린 북저(北渚) 김류[1571~1648]의 「심양으로 부치는 글[付書瀋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