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3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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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溫陽別試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박범 |
[정의]
조선시대 왕의 온행 때 충청남도 아산 지역에서 문과와 무과를 실시하여 합격자를 뽑아 등용한 시험.
[개설]
별시(別試)는 정기적으로 치러지는 식년시(式年試) 외에 별도로 실시되던 시험이다. 유생들의 학문 의욕을 진작시키고, 국가의 중요한 행사를 기념하기 위해 실시하였다. 별시에는 증광시(增廣試), 외방별시(外方別試), 알성시(謁聖試) 등이 있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왕이 온천욕을 위해 온양을 찾을 때는 온양 지역 고을에 많은 물질적 부담이 발생하였다. 어가(御駕)가 지나가는 도로의 정비는 물론 행궁(行宮)과 온궁(溫宮)의 정비, 백성과 군대의 동원 등이 반드시 수반되었다. 따라서 온행(溫幸)은 민력을 소모한다는 이유로 신하들의 반대에 직면하기도 하였다. 왕실 또한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온행로(溫幸路)와 온양 인근 고을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여러 가지 대책을 마련하여 시행하였다. 일반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어공(御供)을 면제하거나 가짓수를 줄여서 받았다. 또한 온행이 있는 해의 세금을 감해 주기도 하였다. 사족층을 위해서는 별시를 시행하기도 하였다.
온양별시(溫陽別試)는 충청도 지역 사대부로 응시 대상을 제한하였고, 실시하기 며칠 전에 별시가 있음을 공표하였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온양 인근의 사족만이 참가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 사족의 일생 목표 중 하나가 과거 급제였기 때문에 온양별시는 온양 인근 사족에게 민폐를 감수하는 대가로 시행한 민심 회유 방편이었다.
[관련 기록]
온양별시는 1464년(세조 10) 3월 세조의 온행 때 처음 실시되었다. 이후 현종, 숙종, 영조가 온행을 와 온양별시를 시행하였다. 온양별시는 4명의 왕이 6번 실시하였다. 관련 기록은 『세조실록』 1464년 3월과 1468년(세조 14) 2월, 『현종실록』 1664년(현종 5) 4월과 1666년(현종 7) 4월, 『숙종실록』 1717년(숙종 43) 3월, 『영조실록』 1750년(영조 26) 9월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내용]
총 6번에 걸쳐 실시된 온양별시에서는 문과 49명, 무과 713명의 급제자가 나왔다.
[변천]
처음 온양별시를 실시했던 세조 때는 문과와 무과 모두 초시(初試)와 중시(重試)로 나누어 실시하였다. 과거 대상이 충청도 사람으로 제한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다른 지역 사람도 응시할 수 있도록 편의를 봐주기도 하였다. 현종 대에 이르러 지역민에 대한 배려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초시와 중시 2번 보던 시험이 정시 1번으로 간소화되었고, 응시자가 충청도 호적에 들어 있어야 한다는 제한도 생겼다. 또한 현직 수령이 응시 대상에서 제외되어 온양별시가 지방 사족을 배려하려는 성격을 갖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규정은 숙종, 영조 대에 시행된 온양별시에도 이어져 온양 인근 사족에 대한 우대 정책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온양별시는 적지 않은 수의 지역 사족에게 특별한 과거 응시 기회를 부여함으로써 온행으로 인해 발생한 지역민의 피로감을 완화하여 지역을 안정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