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0420
한자 三一運動
영어공식명칭 March 1st Movement
이칭/별칭 기미독립만세운동,기미독립운동,삼일만세운동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조형열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3월 1일연표보기 - 3·1운동 시작
전개 시기/일시 1919년 3월 11일 - 온양공립보통학교 학생 만세 시위
전개 시기/일시 1919년 3월 12일 - 온양장터 1차 만세 시위
전개 시기/일시 1919년 3월 14일 - 온양장터 2차 만세 시위, 영인면 만세 시위
전개 시기/일시 1919년 3월 15일 - 온양면 만세 시위
전개 시기/일시 1919년 3월 18일 - 신창면 만세 시위 시도, 불발
전개 시기/일시 1919년 3월 31일 - 탕정면·염치면·배방면 횃불 시위
전개 시기/일시 1919년 4월 1일 - 둔포면 만세 시위 및 일본인 소유 광혈 20여 개소 파괴
전개 시기/일시 1919년 4월 2~3일 - 영인면·인주면·둔포면 해안가 횃불 시위, 영인면 영인산 횃불 시위, 신창면 학성산 횃불 시위
종결 시기/일시 1919년 4월 4일 - 선장면 만세 시위
발생|시작 장소 온양공립초등학교 만세운동 - 충청남도 아산시 온주길26번길 10[읍내동 150]지도보기
종결 장소 4·4 아산독립만세운동 - 충청남도 아산시 선장면 군덕리 지도보기
성격 독립만세운동
관련 인물/단체 현창규|권병덕|서만수|권태원|김치삼|박민성|조명원|이상균|오봉환|박동은|김복희|한연순|김상철|박진화|정윤흥|김양순|김금복|강순화|손천일|김원배|승일상|이상균|김학삼|김상준|신흥남|이창균|강복개|강달성|이덕균|정규희|서몽조|임천근|오상근|김천봉|최병수|쇼지 마고사부로우|온양공립보통학교|신창공립보통학교|백암교회

[정의]

1919년 서울에서 시작한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3~4월 동안 충청남도 아산 각지에서 만세 시위, 횃불 시위 등 다양한 형태로 전개된 독립운동.

[개설]

아산의 3·1운동은 3월 11일 온양공립보통학교[지금의 온양초등학교] 학생들의 만세 시위로부터 시작하여 4월 4일 선장면 군덕리 시장에서 지역민들의 만세 시위를 끝으로 약 25일에 걸쳐 전개되었다.

[역사적 배경]

충청남도 아산 지역은 조선시대부터 온양·아산·신창 3개 권역을 중심으로 생활권을 형성하였다. 아산에는 기독교, 천주교, 천도교 등 다양한 종교 집단이 자리 잡았으며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항일 의병 활동과 애국계몽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1910년대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 등의 비밀결사운동을 통해 독립운동에 헌신하고자 했던 청년세대가 등장하였다. 이러한 지역적 조건을 바탕으로 서울에서 3·1운동의 열기가 전파되자 아산에서도 3월 중순부터 본격적인 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경과]

첫 독립 만세 소리가 퍼진 것은 3월 11일 온양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시위였다. 학생들은 학교 운동장으로 뛰쳐나왔고 일본인 학교장이 나와 학생들을 설득하였다. 일부 학생들은 스스로 해산했고, 나머지는 계속해서 독립 만세를 부르기로 결의하였다.

3월 12일 독립 만세 소리가 드디어 학교 담을 넘어 시장으로 번져 나갔다. 오후 2시 30분 온양장터에서 학생 30여 명이 주민 200여 명과 함께 만세를 외치고 그로 인해 주동 인물이 체포되었다.

3월 14일 장터에 또다시 독립선언서가 뿌려졌다. 현창규(玄昌奎)는 서울의 3·1운동에 참가했다가 천도교 도사(道師) 권병덕(權秉悳)의 지시를 받고 3월 중순 온양에 돌아와 서만수(徐萬壽), 권태원(權泰源), 김치삼(金致三) 등과 온양장터에서 운동을 전개하기로 모의하였다. 이날 시위의 참가자는 수백 명이라고만 알려져 있다. 이는 천도교의 영향 아래 전개된 것으로, 다음 날인 3월 15일에도 온양면에서는 100여 명이 독립 만세를 불렀고, 주동자 9명이 체포되었다.

3월 14일 영인면에서도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오후 1시경 약 15명이 태극기를 들고 아산리 아산시장에 나타나 지역민들에게 독립 만세를 함께 부르자고 하였다. 일단 주동자가 체포되어 진정되었는데 저녁 6시에 이르러 약 100명이 읍 밖에서 집합하였다가 읍내로 들어오려 해 온천리 헌병분견소(憲兵分遣所)에서 헌병 7명이 급히 출동하였고 주동자 9명을 체포하고 해산시켰다. 그럼에도 일제는 형세가 불온한 상태라 경계 중이라고 기록을 남겼다. 또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는 공세리 예수교인 중에 불온한 운동이 있었으므로 헌병수비대는 이 지역에 주둔하고 목하 엄중 경비 중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3월 18일 신창면에서는 박민성(朴敏成)이 오후 1시쯤 읍내시장에서 조명원(趙溟元), 이상균(李祥均)에게 "오늘 장에 나가서 독립 만세를 외쳐라."라고 교사를 하고, 보통학교[신창공립보통학교로 추정] 학생 김안기(金安基)에게도 같은 선동을 했다고 한다. 박민성은 33세의 청년이었고, 이 시위는 시도로만 끝났을 뿐 성공하지 못했다.

약 2주의 휴지기 이후 시위 운동은 횃불을 동반해 더욱 거세게 일어났다. 3월 31일 밤 8시경 탕정면, 염치면, 배방면 등에서 각 동리 산 50여 군데에서 횃불을 올리고 2,500여 명의 군중이 "대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탕정면에서 봉화가 오른 곳은 명암리 장무기마을 쪽이었다. 장무기마을 서남쪽 산줄기인 새매에서 주민들이 봉화를 올린 것이다. 염치면에서는 고종 인산(因山) 때 상경했던 오봉환(吳鳳煥)이 박동은(朴東銀)과 상의하여 마을 주민을 계몽하고 횃불을 올리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또한 염치면 백암리[현 염치읍 백암리]에서는 3월 31일 이화학당(梨花學堂) 여학생 김복희(金福姬)와 영신학교(永信學校) 여교사 한연순(韓連順)이 주동이 되어 동리의 북쪽 산[방화산(芳華山)]에서 횃불을 올리고 백암교회(白岩敎會) 김상철 장로를 비롯해 교인 20여 명과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불렀다. 김복희는 유관순(柳寬順)의 2년 선배로 함께 학교를 다녔고, 백암교회 내 영신학교를 졸업한 여성 지식인이었다. 한연순은 고향은 대구였지만 외국인 선교사들과의 인연으로 영신학교에 부임하였다. 두 사람은 결국 체포되어 김복희는 2개월, 한연순은 3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4월 1일 둔포면의 시위는 운용리 광산 소재지에서 일본인 소유의 광혈(鑛穴)[갱] 20여 군데를 파괴하였다. 둔포면, 음봉면 등은 광산 채굴권의 이동이 심했고 여기에는 일본인들이 적극 개입하고 있었다. 이미 인근 성환의 직산금광(稷山金鑛)에서는 3월 28일 광부들이 대규모 만세 시위를 벌인 바 있었다. 이날의 시위는 ‘충청남도 아산의 금광 노동자가 시위’를 벌였다고 1970년대 중반 원호처[지금의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발간된 『독립운동사』에 기록되어 있다.

4월 2일과 3일에도 시위는 지속되었다. 이는 세 방향에서 전개됐는데, 우선 첫 번째가 영인면백석포인주면공세리·걸매리, 둔포면둔포 등 해안가의 일어난 횃불 시위였다. 두 번째는 영인면 영인산의 횃불 시위였는데, 기독교인이 중심이 된 운동이었다. 세 번째는 신창면의 횃불 시위였다. 신창면의 시위는 많은 군중이 2일 밤 학성산 위에 올라가 횃불을 올리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전개되었다. 군중들은 산상 봉화(山上烽火)에 만족하지 않고 산을 내려와 돌을 주워들고 신창면사무소에 돌을 던져 문 2개를 부수었다. 또 헌병주재소와 신창공립보통학교에도 돌을 던져 학교 유리창 272매와 문 4개가 파괴되었다. 이날의 사건으로 모두 15명이 체포되었다. 박진화(朴秦和), 정윤흥(鄭允興), 김양순(金良順), 김금복(金今福), 강순화(姜順和), 손천일(孫千日), 김원배(金元培), 승일상(承一相), 이상균(李相均), 김학삼(金學三), 김상준(金相俊), 신흥남(新興南), 이창균(李昌均), 강복개(姜福介), 강달성(姜達成) 등이다. 판결문을 보면 이들은 체포되지 않은 이덕균(李悳均)의 지시에 따라 해당 장소들에 투석하였고, 그 과정에서 인력거꾼 박진화가 열성적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인명 살상이 없었음에도 일제 사법당국은 이들에게 모두 1년 6개월 이상의 형벌을 가하였다. 1개 면 내에서 15명이나 수형 생활을 한 경우는 흔치 않으며 아산 내에서도 수감자의 수로는 가장 많았다. 신창면의 운동을 이끌었던 이들은 30세 전후의 주로 읍내리에 거주하던 민족의식이 강한 청장년이었다. 또한 박진화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농민 외에도 노동자 출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시위 운동이 다양한 사회계층으로 확산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4월 4일에는 선장면 군덕리에서 4·4 아산독립만세운동으로도 불리는 아산 지역 3·1운동 가운데 가장 큰 시위가 일어났다. 선장면은 일찍이 물길이 발달해 인천기선회사(仁川機船會社)의 배가 출입하는 등 외부와의 교통이 활발하였고, 동학의 영향을 받은 이들도 많았다. 장날을 맞아 만세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일제는 선장면 만세운동의 주동자로 정규희(丁奎熙)[이칭 정수길(丁壽吉)], 서몽조(徐夢祚), 임천근(林千根), 오상근(吳相根), 김천봉(金千鳳) 등을 지목하였다. 이 가운데 정규희동학농민운동에 참여했던 정태영(丁泰榮)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향리의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고, 1907년 13세의 나이에 천도교에 입교하였다. 그리고 1908년 신창 사립 신민학교(新民學校)에 입학해 신학문을 익히기도 하였다. 주동자들은 대부분 20~30대였다. 오상근은 판결문상에는 직업이 농업이라고 명시되어 있지만 수형인명부(受刑人名簿)에는 고인(雇人), 즉 노동자라고 되어 있다. 본적도 충청남도 보령이고 출생지도 보령이다. 주동자들은 모두 2년 6개월의 형을 선고받았다. 이날의 시위는 가장 적극적인 저항운동의 형태를 띠었다. 판결문에 따르면 "김천봉은 솔선하여 힘을 돋우고 정수길, 서몽조, 임천근, 오상근은 곤봉을 휘두르며 군중을 지휘하여 동면 헌병주재소에 쇄도하여 구내에 침입, 창 유리에 투석"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일제 당국은 이를 폭력적으로 진압하였다. 헌병 조장(曹長) 쇼지 마고사부로[庄司孫三郞]가 발포를 이끌어 주동자 중 한 명인 최병수(崔炳洙)가 목숨을 잃었다. 이 밖에도 100여 명이 야만적 처벌인 태형(笞刑)을, 1명이 벌금 처분을 받았다. 이들은 각 마을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었고, 다양한 연령대에 걸쳐 있었다. 선장면 만세운동은 모든 면민들이 하나가 되어 전개한 독립투쟁으로서 아산 지역 3·1운동의 대미를 장식한 사건이었다.

[결과]

아산 지역의 3·1운동은 4월 4일 이후 다시 일어나지 못하였다. 헌병 조장의 지휘 아래 헌병 33명, 보병 47명이 무력적 탄압을 일삼았고, 이로 인해 1명 순국, 7명 부상, 69명 이상이 체포를 당하였다. 또한 태형은 266명을 대상으로 4월 중순 이후 집중적으로 집행되었다. 일제는 1개월 가까이 아산 내 모든 시장을 폐쇄시켰다가 4월 말이 되어서야 영업 재개를 허락해 막대한 생활고를 일으켰다. 모든 사건 처리가 끝난 뒤 일제는 아산 내 친일파를 대거 동원하여 간담회를 개최하는가 하면 통치에 절대 협력하겠다는 서약서 제출을 강요하였다.

[의의와 평가]

아산 지역의 3·1운동은 몇 가지 측면에서 지니는 의의가 크다. 첫째, 생활권이 다른 모든 곳에서 만세 시위가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지역 내 기독교, 천주교, 천도교 등 모든 종교 집단이 한데 어울려 일으킨 독립운동이다. 둘째, 초창기에는 평화적인 만세 시위로 진행되다가 산 위의 횃불 시위로 확대되었고, 마지막에는 직접 관공서에 투석을 하는 등 격렬한 저항운동으로 발전한 독립운동이었다. 셋째, 농민층을 중심으로 학생, 노동자 등 다양한 계층이 힘을 모은 독립운동이었다. 넷째, 주도층의 나이가 대개 20~30대로 일제 식민통치 아래 새로운 운동이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 독립운동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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