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5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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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靈槐臺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온천대로 1459[온천동 242-10]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남상권 |
건립 시기/일시 | 1795년 - 영괴대비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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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1984년 5월 17일 - 영괴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28호 지정 |
현 소재지 | 영괴대비 - 충청남도 아산시 온천대로 1459[온천동 242-10] |
성격 | 비석 |
양식 | 비좌개석(碑座蓋石) |
관리자 | 온양관광호텔 |
[정의]
1760년(영조 36) 7월 영조와 사도세자가 온양행궁으로 왔을 때, 사도세자가 활을 쏘며 무술을 연마하던 터에 1795년(정조 19) 정조의 명으로 세운 대와 비각.
[개설]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思悼世子)[1735~1762]가 피부질환을 온천요법(溫泉療法)으로 치료하기 위해 부왕의 허락을 받아 26세 되던 1760년 온양행궁에 행차하였을 때 활터를 마련하고 활쏘기 연습을 하였다.
[위치]
영괴대비를 관리하고 있는 온양관광호텔은 충청남도 아산시의 온천동에 있으며, 호텔의 앞뜰에 보호 공간을 조성하여 관리하고 있다.
[변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화살 다섯 발을 곰 모양의 과녁 눈에 정확히 쏘아 명중시켜 이 기념으로 사도세자가 느티나무 세 그루를 심었다"는 내용의 시에서 영괴대(靈槐臺) 흔적이 유추되었다. 이에 온양군수 윤염(尹琰)이 온궁당직 이한문(李漢文)을 시켜 사도세자가 활을 쏘던 자리에 품(品) 자 형태로 어린 느티나무 세 그루를 심은 데서 유래한다. 1795년 온양군수 변위진(卞緯鎭)의 지휘로 온궁의 느티나무 주변에 축대를 쌓고 충청도관찰사 이형원(李亨元)이 그곳을 ‘영괴대’라 칭하고 조정에 보고하자 정조가 어필(御筆)로 ‘영괴대’를 써서 내려보내고 그곳에 비(碑)를 세우라는 어명으로 그해 8월 초순에 착공하였다.
[형태]
남포오석(藍浦烏石)으로 비(碑)를 만들고 1795년 10월 24일 영괴대 비각(碑閣) 안에 비석을 세웠다. 정조가 어제영괴대명(御製靈槐臺銘)을 짓고 윤염(尹琰)의 아들 윤행임(尹行恁)이 글씨를 썼다. 비석의 정면에는 정조가 쓴 ‘영괴대(靈槐臺)’가 석각되어 있고, 후면에는 ‘어제영괴대명(御製靈槐臺銘)’이 쓰여 있다. 비석의 뒷면에는 "소자[정조]가 즉위한 지 20년째인 을묘년 가을, 소자의 생일 전에 공경히 절하고 이 명을 쓴다"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의의와 평가]
영괴대비는 사도세자의 몇 안 되는 역사적 흔적이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중에도 소실되지 않고 남아 있어 오늘날 온양행궁의 위치를 알려 주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정조 임금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향한 부정(父情)과 효심을 느낄 수 있는 역사적인 문화유산으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