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6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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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洪可臣 |
영어공식명칭 | Hong Gasin |
이칭/별칭 | 흥도(興道),만전당(晩全堂),간옹(艮翁)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대동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교빈 |
출생 시기/일시 | 1541년 7월 17일 - 홍가신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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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67년 - 홍가신 진사시 입격 |
활동 시기/일시 | 1571년 - 홍가신 음직으로 강릉참봉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74년 - 홍가신 부여현감 재직 시 삼충사 건립 |
활동 시기/일시 | 1589년 - 홍가신 정여립과의 친분으로 파직됨 |
활동 시기/일시 | 1592년 - 홍가신 경기도 남양에서 의병을 일으킴 |
활동 시기/일시 | 1593년 - 홍가신 파주목사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94년 - 홍가신 홍주목사에 임명, 홍주성 방어 |
활동 시기/일시 | 1596년 - 홍가신 이몽학의 난 평정 |
활동 시기/일시 | 1604년 - 홍가신 자헌대부 겸 형조판서로 승진 |
활동 시기/일시 | 1606년 - 홍가신 영원군에 봉해짐 |
활동 시기/일시 | 1610년 - 홍가신 관직에서 물러남 |
몰년 시기/일시 | 1615년 6월 14일 - 홍가신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615년 - 홍가신 우의정 추증 |
추모 시기/일시 | 1642년 - 홍양청난비 건립 |
추모 시기/일시 | 1693년 - 홍가신 문장 시호 받음 |
추모 시기/일시 | 1707년 - 홍가신 인산서원, 정퇴서원에 배향 |
추모 시기/일시 | 1717년 - 홍가신 신도비 건립 |
추모 시기/일시 | 1965년 - 홍가신 도강영당에서 제향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홍가신 청난사에서 제향 |
출생지 |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대동리 |
묘소|단소 | 홍가신 묘 -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대동리 |
사당|배향지 | 인산서원지 -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서원리 |
사당|배향지 | 정퇴서원지 -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중리 |
사당|배향지 | 청난사 -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월산리 |
사당|배향지 | 도강영당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부소로 15[관북리 28-4] |
성격 | 문관 |
성별 | 남 |
본관 | 남양 |
대표 관직 | 홍주목사|형조판서 |
[정의]
조선 중기 충청남도 아산 출신의 문신.
[개설]
홍가신(洪可臣)[1541~1615]은 조선 14대 왕 선조 때 활동한 문신이다. 과거시험을 통해 벼슬에 나아간 것은 아니었으나 임진왜란 중 왜군을 막은 공이 크며,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하는 데 힘을 보탰다. 강직하고 온후한 인품으로 목민관의 역할을 다하였고, 불천지위(不遷之位)[큰 공훈이 있어 영원히 사당에 모시기를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神位)]가 내려졌으며, 인산서원(仁山書院)과 정퇴서원(靜退書院)에 모셔졌다.
[가계]
홍가신의 본관은 남양(南陽)으로 토홍계(土洪系)이며, 자는 흥도(興道), 호는 만전당(晩全堂)·간옹(艮翁)이다.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대동리에서 태어났다. 증조할아버지는 이조참의 홍한(洪瀚)이고, 할아버지는 조선 최초의 기근 대책서 『충주구황절요(忠州救荒切要)』를 지은 내섬시판관(內贍寺判官) 홍윤창(洪胤昌)이다. 아버지는 아산 지역의 입향조(入鄕祖)로 장원서장원(掌苑署掌苑)을 지낸 홍온(洪昷)이고, 어머니는 군수 신윤필(申允弼)의 딸인 흥양신씨(興陽申氏)이다. 부인 재령이씨(載寧李氏) 사이에 5남 2녀를 두었다. 첫째 아들 홍은(洪檃), 둘째 아들 홍영(洪榮), 셋째 아들 홍절(洪楶)은 현감을 지냈고, 넷째 아들 홍비(洪棐)는 참판에 추증되었다. 홍비는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사위이고, 홍영은 허엽(許曄)의 손주사위이다. 손자들로 홍우원(洪宇遠)은 판서에 올랐고, 홍우정(洪宇定)은 불천위(不遷位)에 오른 학자로서 태백오현(太白五賢)으로 칭송을 받았으며, 홍우량(洪宇亮)은 청백리에 올랐다.
[활동 사항]
1567년(선조 즉위년) 진사시에 3등으로 입격(入格)하였으나, 과장(科場)에서 징계를 받은 적이 있어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성리학에 몰두하였다. 1571년(선조 4) 음직(蔭職)[과거를 거치지 아니하고 조상의 공덕에 의하여 맡은 벼슬]으로 강릉참봉이 되었고, 형조좌랑을 거쳐 부여현감이 되어서는 백제의 충신 성충(成忠)·흥수(興首)·계백(階伯)을 모신 삼충사(三忠祠)를 세웠다. 성혼(成渾), 정인홍(鄭仁弘) 등과 함께 추천을 받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 되었고, 안산군수를 거쳐 수원부사로 있다가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과 가깝다는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기도 남양에서 사람을 모아 왜군과 싸웠고, 파주목사를 거쳐 홍주목사가 되어 홍주성(洪州城) 방어에 성공하였다. 1596년(선조 29) 이몽학의 난을 평정하였고, 강화부사·중추부첨지사(中樞府僉知事)를 지냈으며, 형조참판에 임명되었다. 강원도관찰사와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형조판서를 맡았다. 광해군 때 장예원정(掌隸院正)·한성부우윤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지내고, 1610년(광해군 2) 관직에서 물러났다. 국가에서 내린 녹(祿)을 사양한 채 아산에 머물다 75세에 죽은 뒤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학문과 저술]
민순(閔純), 허엽, 이황(李滉)에게 배웠다. 일찍부터 시와 문장에 능해 임진왜란 중에 올린 「적패퇴봉사(賊敗退封事)」가 유명하며, 저서로 『만전집(晩全集)』, 『만전당만록(晩全堂漫錄)』이 있다.
[묘소]
홍가신 묘는 아산시 염치읍 대동리에 부인과 합장 형태로 있다. 스스로 비문을 지은 비갈(碑碣), 후손들이 세운 영당(影堂), 1717년(숙종 43)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조경(趙絅)이 쓴 홍가신 신도비가 있다.
[상훈과 추모]
1604년(선조 37)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공을 인정받아 분충출기합모적의청난공신(奮忠出氣合謀迪毅淸難功臣) 1등에 올라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 겸 형조판서로 승진하였으며, 1606년(선조 39)에는 영원군(寧原君)에 봉해졌다. 1693년(숙종 19) 문장(文壯)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부조묘(不祧廟)[불천지위]가 내려졌으며, 1642년(인조 20) 홍주목사 재임 중의 공을 기려 당시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이던 조경이 지은 홍양청난비(洪陽淸難碑)가 홍성에 세워졌다. 또한 부여의 도강영당(道江影堂)에 허목(許穆)·채제공(蔡濟恭)과 함께 영정이 봉안되어 있고, 아산의 인산서원과 온양의 정퇴서원에 모셔졌다.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월산리에 있는 백월산(白月山)에는 무속인들이 신격화하여 자주 찾는 홍주정난사(洪州靖難祠)[홍가신 사당]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