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7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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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雄烈 |
영어공식명칭 | Yun Woongryul |
이칭/별칭 | 영중(英仲),반계(磻溪)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최만정 |
출생 시기/일시 | 1840년 4월 17일 - 윤웅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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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56년 - 윤웅렬 무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861년 - 윤웅렬 충청감영 중군 겸 공주 중군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862년 - 윤웅렬 함경북도 병마우후토포사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881년 - 윤웅렬 별기군 좌부령관, 통리기무아문사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886년 4월 - 윤웅렬 전라도 능주로 유배 |
추모 시기/일시 | 1898년 - 윤웅렬 선정비 건립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6월 - 윤웅렬 서울 중서동 상업전문학교 교장에 취임 |
활동 시기/일시 | 1910년 10월 - 윤웅렬 남작 직위 수여 |
몰년 시기/일시 | 1911년 9월 22일 - 윤웅렬 사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06년 - 윤웅렬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 포함 |
출생지 | 충청남도 아산시 둔포면 석곡1리 |
거주|이주지 | 이주지 - 서울특별시 |
활동지 | 유배지 - 전라남도 화순군 |
활동지 | 피신지 - 일본 나가사키 |
활동지 | 피신지 - 중국 상하이 |
묘소 | 충청남도 아산시 둔포면 석곡1리 |
성격 | 무신|관료 |
성별 | 남 |
본관 | 해평(海平) |
대표 경력 | 군부대신|육군부장|남작 |
[정의]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 시기 충청남도 아산 출신의 무신이자 관료.
[개설]
한말의 정치가 윤치호(尹致昊)의 아버지이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후 조선 합병에 공을 세운 친일 인물들을 포상할 때 남작(男爵) 작위를 받았다.
[가계]
윤웅렬(尹雄烈)[1840~1911]의 본관은 해평(海平)이고, 자는 영중(英仲), 호는 반계(磻溪)이다. 충청남도 아산 지역의 입향조 윤득실(尹得實)의 손자이며, 윤취동(尹取東)과 부인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장남으로 1840년(헌종 6) 4월 17일에 태어났다. 동생은 윤영렬(尹英烈)이다. 전주이씨(全州李氏) 이정무(李貞武)와의 사이에서 딸 윤경희(尹慶姬)와 아들 윤치호(尹致昊)를 낳았으며, 김해김씨(金海金氏) 김정순(金貞淳)와의 사이에서 윤치왕(尹致旺)과 윤치창(尹致昌)을 낳았다. 윤치호는 일본제국의회 귀족원(貴族院) 칙선(勅選) 의원에 임명되는 등 저명한 친일 인사이다.
[활동 사항]
1. 별기군 주도 후 임오군란으로 피신
1856년(철종 7) 무과에 급제하였다. 1861년(철종 12) 충청감영(忠淸監營) 중군(中軍) 겸 공주(公州) 중군, 1862년(철종 13) 함경북도병마우후토포사(兵馬虞侯討捕使)에 각각 임명되었다. 1880년(고종 17) 5월 제2차 수신사(修信使) 김홍집(金弘集)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동행하였다. 1881년(고종 18) 4월 조선 최초의 신식 군대인 별기군(別技軍) 좌부령관(左副嶺官)이 되었으며, 5월 통리기무아문사(統理機務衙門事)에 임명되었다. 구식 군인들에 대한 봉급 연체와 불량 쌀 지급 등 차별 대우로 1882년(고종 19)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난 시기에 일본 공관이 습격당할 것이라는 정보를 파악하여 몇 시간 전에 일본 공사에게 통보하였고, 자신 또한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피신하였다. 청나라 군대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을 중국으로 끌고 가는 등 반란이 실패로 돌아가자 1882년 12월 귀국하여 별군직(別軍職)을 거쳐 남양부사(南陽府使)에 임명되었다.
2. 갑신정변으로 유배된 뒤 복귀
1883년(고종 20) 3월부터 함경남도병마절도사(咸鏡南道兵馬節度使)를 지냈고, 1884년(고종 21) 7월 총융청(摠戎廳) 중군과 친군전영(親軍前營) 정령관(正領官)이 되었다. 1884년 10월 김옥균(金玉均) 등 개화파가 일본군 지원을 받아 일으킨 갑신정변에 참여하여 형조판서(刑曹判書)에 내정했으나 소극적이었다. 3일 천하로 갑신정변이 실패한 후 이에 대한 탄핵 의견이 지속되었고, 신기선(申箕善) 일파로 몰려 1886년(고종 23) 4월부터 전라도 능주[지금의 전라남도 화순군]로 유배되었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김홍집 내각 출범과 함께 청일전쟁을 시작한 즈음인 1894년(고종 31) 6월에 해배되었다. 1894년 9월에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해 경병(京兵)을 인솔했으며, 11월 경무사(警務使)에 임명되었고, 1895년(고종 32) 2월 경상좌도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를 지냈다.
3. 춘생문사건 가담과 피신, 귀국 후 요직 역임
1895년 10월 을미사변 이후 11월 친미파·친러파 관리와 군인들이 일본군에 감시당하고 있는 고종을 탈출시켜 미국 공사관으로 옮기려다 실패한 춘생문(春生門)사건에 가담하였다. 주모자들을 모반 혐의로 친일내각 재판관들이 교수형과 유배형에 처했고, 윤웅렬은 중국 상하이로 피신하였다. 1896년(고종 33) 2월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귀국하여 3월 군부협판(軍部協辦)에 임명되었고, 4월 육군부령으로 친위제1연대장(親衛第一聯隊長)에 이어 5월 육군참장(陸軍參將)으로 진급하였고, 8월부터 전라남도관찰사(全羅南道觀察使)로서 전라남도재판소 판사(判事)를 겸임하였다. 1897년(고종 34) 10월 대한제국 수립 후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내부협판(內部協辦), 귀족원경(貴族院卿), 법부협판(法部協辦), 고등재판소 재판장(裁判長), 의정부찬정(議政府賛政), 군부대신(軍部大臣) 등 수년 동안 요직을 거쳤다. 1907년(고종 44) 군대 해산으로 육군부장(陸軍副將)에서 해임되어 전역하였다.
4.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 소장과 친일반민족행위자
1907년 6월 서울 중서동의 상업전문학교 교장에 취임하였고,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여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國債報償志願金總合所) 소장에 선출되었다. 1908년(순종 2) 7월 국채보상금 중 3만 원을 영국인 베델(E. T. Bethell)이 사취했으므로 반환을 요청한다는 반환 청구서를 제출하고, 소장직을 사직하였다. 같은 달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회장에 선출되었다. 1909년(순종 3) 4월부터 6월까지 통감부(統監府)에서 조선 통치의 정당성을 홍보하고 일본 발전상을 선전하기 위해 조직한 일본 관광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왔다. 합병 직후인 1910년 10월 조선귀족령에 따라 남작 직위를 받았다. 1910년 12월 국채보상금처리회 유길준(兪吉濬) 등이 관리 중이던 9만여 원과 윤웅렬 등이 보관 중이던 국채보상금 4만 2000여 원이 통감부와 경무총감부(警務摠監部)에 납입 이관되었다. 1911년 1월 은사공채(恩賜公債) 2만 5000원을 받았다. 1911년 9월 22일 사망하였다.
5. 선정비 논란
1898년(고종 35) 전라남도 광주 시내에 세워졌던 윤웅렬의 선정비인 ‘관찰사 윤공웅렬 선정비(觀察使尹公雄烈善政碑)’는 2019년 3월 기준 광주향교 옆 광주공원 사적비군에 있는데 친일파 관련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에는 윤웅렬이 이용하였던 별장이 ‘반계 윤웅렬 별장’이라는 이름으로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12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묘소]
충청남도 아산시 둔포면 석곡1리 해평윤씨 종중 묘역에 있다. 2009년 봉분을 평평한 돌무덤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상훈과 추모]
2006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의 일제강점기 초기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 포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