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4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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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成雨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홍제연 |
출생 시기/일시 | 1327년 - 김성우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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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380~1381년 - 김성우 왜구 격퇴 |
몰년 시기/일시 | 1392년 - 김성우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607년 - 김성우 묘비 건립 |
추모 시기/일시 | 1936년 - 김성우 묘우유허비 건립 |
거주|이주지 | 이주지 -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 |
부임|활동지 | 활동지 - 충청남도 보령 고만(高巒)|군입리(軍入理)|의평리(蟻坪理) |
묘소|단소 | 김성우 묘소 -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 나원리 산1-1번지 |
사당|배향지 | 사당 -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 나원리 |
성격 | 무관 |
성별 | 남 |
본관 | 광산 |
대표 관직 | 전라우도 도만호 |
[정의]
고려 말 충청남도 보령 지역의 왜구를 격퇴하고, 보령에 정착한 광산 김씨의 입향조.
[개설]
김성우(金成雨)[1327~1392]는 고려 말 전라우도 도만호(都萬戶)로, 보령을 황폐화시킨 왜구를 소탕하고 보령에 정착하였으나 조선 건국 후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신념으로 자결하였다.
[가계]
본관은 광산(光山), 증조할아버지는 고려 후기의 시중 김주정(金周鼎)[?~1290], 아버지는 판도판서 김윤장(金允臧)이다. 4대손은 우의정 김극성(金克成)[1474~1540]이다.
[활동 사항]
김성우가 고려 말 전라우도 도만호 초토사(招討使)로서 왜구를 토벌하라는 명을 받아 충청도 서해안을 지날 때, 보령 지역이 왜구의 침략으로 황폐화된 것을 보고 왜구를 소탕하고자 하였다. 『여지도서(輿地圖書)』와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에 따르면, 이때 홀연히 신마(神馬)와 보검이 나와 김성우를 보필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신마가 나온 보우리는 옥마봉, 보검이 나온 동리는 비도라 한다. 뿐만 아니라 김성우의 군사가 들어온 곳을 군입포, 김성우가 병사를 매복시킨 곳은 매복, 김성우가 소탕한 왜구의 시체가 개미처럼 운집한 곳은 의평리라 하였는데 이렇듯 김성우의 행적이 곧 충청남도 보령 곳곳의 지명이 되었다.
김성우는 왜구를 토벌한 공으로 충청남도 보령에 사패지(賜牌地)를 하사 받았다. 김성우는 황해도 개경 출신이었지만, 좋은 땅이 황폐화된 것을 안타깝게 여겨 보령 청라동에 집을 마련하여 정착하였다. 그리고 초토영전사로서 황폐화된 충청남도 보령 지역의 땅을 영전하며 뿔뿔이 흩어졌던 백성들이 들어와 살 수 있도록 하였다. 김성우는 발산(鉢山), 마산(馬山), 청소(靑所)를 비롯한 여러 지역의 땅을 소유했으며, 상당한 재산을 형성하였다. 이들 광산 김씨들은 ‘청라 김씨’라고도 불렸으며, 조선 초기 보령 지역의 가장 유력한 사족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던 중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건국 세력들이 김성우를 불러들이고자 하였다. 이에 김성우는 불사이군의 충절로 그 청을 끝까지 거절하고 자결하였다.
생전에 김성우는 ‘재물을 탐하지 말 것’과 ‘비록 적군이라 하나 왜군을 많이 죽인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니, 후손들은 덕을 많이 베풀라’는 당부를 남겼다. 그에 따라 후손들은 보령에 세거하며 재물에 뜻을 두지 않고, 주변에 덕을 베풀었고, 사람들은 김성우의 후손 광산 김씨를 충청남도 보령 땅의 주인이라 일컬었다.
[묘소]
김성우의 묘소는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 나원리 산1-1번지에 있다.
[상훈과 추모]
보령문화원 주관으로 해마다 제향을 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