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5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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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藍浦縣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
시대 | 고려/고려 전기,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강종원 |
[정의]
고려 시대 충청남도 보령시 남포면 지역에 설치된 행정 구역의 명칭.
[개설]
남포현(藍浦縣)은 신라 때 개칭된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서림군의 영현(領縣)이었다. 1018년(현종 9)에 가림현에 이속시켰다가 후에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1390년(공양왕 2)에 진성(鎭城)을 설치하였다. 대몽 항 쟁기에는 삼별초의 공격으로 감무가 잡혀갔으며, 고려 말에는 왜구의 침입이 빈번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고려의 지방 제도 정비는 성종(成宗)[재위: 981~997] 초부터 시작되어 현종(顯宗)[재위: 1010~1031 대에 이르러 일단락되었다. 1018년(현종 9) 전국을 5도 4도호부 8목으로 나누고, 그 아래에 56지주군사, 28진장, 20현령을 두었다. 보령 지역에는 보령현과 남포현의 2개 현이 설치되었는데, 남포현은 신라 경덕왕(景德王)[재위 742~765] 대 개칭된 명칭을 그대로 따랐다.
[관련 기록]
『고려사』 권56 지 권제10 지리, 양광도 가림현 남포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남포현(藍浦縣)은 본래 백제의 사포현(寺浦縣)으로, 신라 경덕왕 때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서림군(西林郡)의 영현이 되었다. 현종 9년(1018)에 [가림현에] 내속(來屬)하였다. 뒤에 감무를 두었다. 우왕 6년(1380)에 왜구의 침략을 받아,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공양왕 2년(1390)에 이르러, 처음으로 진성(鎭城)을 설치하여, 유망한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고려사』 권27, 세가 권제27, 원종 13년 9월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중도 안찰사가 보고하기를, ‘삼별초가 고란도에 침입하여 전함 6척을 불사르고 선장(船匠)을 죽이고 조선관 홍주부사 이행검과 결성·남포의 감무를 잡아갔다.”
[내용]
남포현은 신라 웅주(熊州) 서림군[보령시 서천군 서천읍] 영현의 하나였으나, 1018년인 고려 현종 9년 가림군[부여군 임천면]의 속현이 되었으며, 뒤에 감무를 두었다. 지금의 보령시 남포면 양기리 일대이다. 우왕(禑王)[재위: 1374~1388] 때 왜구로 인하여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졌으나 공양왕(恭讓王)[재위: 1389~1392]이 새로이 진성을 설치하고 유망민(流亡民)들을 불러 모았다. 지금의 보령시 남포면·웅천읍 지역이다.
남포현은 보령현과 함께 서해 바다를 끼고 있어 각종 전란에 영향을 받았다. 대몽 항쟁 과정에서는 삼별초가 고란도(孤蘭島) 부근에서 전함 6척을 소각하고, 조선소(造船所)를 기습하여 일본 정벌 병력과 물량 운송을 위해 건조 중이던 전함을 파괴하였다. 이때 홍주부사 이행검과 함께 결성과 남포의 감무가 잡혀가는 일이 발생하였다.
[변천]
신라 경덕왕이 백제 시대 사포현을 남포현으로 개칭하였는데, 고려에서도 그대로 사용하였다. 1018년(현종 9년) 가림현에 이속시켰다가 후에 감무를 두었으며, 1390년(공양왕 2) 진성을 설치하였다. 조선에 들어와 1397년(태조 6년) 진병마사를 두고 판현사를 겸하게 하였다가, 1466년(세조 12)에 진을 없애고 현감을 두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 관제 개편으로 남포군이 되었으며, 1914년 부군 통합령으로 남포군과 보령군, 오천군을 통합하여 보령군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