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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0614
한자 南寺址
영어의미역 Namsaji Temple Site
분야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북면 월백리 산23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집필자 박현열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절 터
원건물 건립시기/일시 통일신라시대
소재지 주소 경상남도 창원시 북면 월백리 산23 지도보기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북면 월백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절 터.

[개설]

남사지노힐부득(努肹夫得)달달박박(怛怛朴朴)의 수도 생활을 기리기 위해 신라 경덕왕백월산에 창건한 남사(南寺)의 터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3에 남백월이성(南白月二聖)의 성도기를 전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백월산에서 동남쪽으로 선천동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이 마을에 노힐부득달달박박이라는 두 젊은이가 살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그 생김새가 비범했고 생각이 높고 깊어서 함께 중이 되어 도 닦기에 열중했다. 이러던 중에 그들은 불법을 공부하려면 마땅히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인간세상을 등지고 백월산 무등골로 들어가게 되었다. 달달박박백월산 북쪽 사자바위를 차지하여 작은 움막을 지어 지내고, 노힐부득은 동쪽의 바위 아래 물이 있는 곳에 돌집을 지어 각각 불도에 정진했다.

3년이 지난 어느 날 밤, 아름다운 낭자가 달달박박이 거처하는 북쪽 암자에 찾아 와서는 하룻밤 자고 가기를 청하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갈 길 더딘데 해는 떨어져 모든 산이 어둡고 길이 막히고 마을은 멀어 인가도 아득하네. 오늘은 이 암자에서 자려 하오니 자비로운 스님은 노여워 마오.” 이에 달달박박은 “절은 깨끗해야 하는 곳이니, 그대는 어서 다른 곳으로 가시오.” 하고 문을 닫고 들어가 불도에 전념했다.

발길을 돌린 낭자는 노힐부득이 있는 암자로 가서 똑같은 청을 하며 시를 읊었다. “첩첩산중에 날은 저물어 가도 가도 아득한 땅 송죽의 그늘은 더욱 깊어 가는데 골짜기의 물소리는 더욱 새로워라. 자고 가길 청함은 길을 잃은 탓도 아니요 스님을 성불하는 길로 인도할까 함이니 바라건대 스님께서 제 청만 들으시고 누구냐고 묻지 마오.” 이 시를 들은 노힐부득은 깜짝 놀라서, “이곳은 여자와 함께 있을 곳이 아니나 중생을 따르는 것도 역시 보살들이 하는 착한 행동의 하나인 것, 깊은 산속 밤이 어두운데 어찌 당신을 소홀히 대접할 수 있겠소.” 하며 낭자를 머무르게 하고는, 정신을 맑게 하여 염불에만 전념했다.

날이 밝으려고 할 때 낭자가 아기를 낳으려는 기운을 보이면서 도움을 청했다. 노힐부득은 애처로운 마음이 들어 짚자리를 마련하고, 물을 데워 목욕을 시켜주고 나니, 그 목욕물이 갑자기 진한 향기를 풍기면서 황금빛으로 변하였다. 노힐부득이 깜짝 놀라자 낭자는 노힐부득도 목욕할 것을 권하였다. 노힐부득이 마지못해 옷을 벗고 목욕을 하니 갑자기 정신이 상쾌해지고 살결이 황금빛으로 빛나면서 옆에 연꽃모양으로 조각된 좌대가 생겨났다. 낭자는 노힐부득에게 그 좌대에 앉기를 권하면서 말하기를 “나는 관음보살인데, 스님을 도와서 최고의 진리를 깨닫게 하려 한 것입니다.” 하면서 사라졌다.

한편, 달달박박은 저녁에 낭자를 물리쳤으니, 낭자가 반드시 노힐부득을 파계시켰을 것이라 믿으며 비웃어 줄 작정으로 노힐부득을 찾아갔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노힐부득은 황금빝의 미륵존상이 되어 연화대에 올라앉아 광명을 내뿜고 있었다. 달달박박은 자신을 찾아온 귀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아름다운 여자로만 본 것을 후회하며 자비로운 미륵존상이 된 노힐부득에게 자신을 이끌어 줄 것을 청하였다. 노힐부득은 이제까지의 내용을 자세히 말해 주며, 남아 있는 목욕물로 몸을 씻게 했다. 그러자 달달박박 역시 무량수불이 되었다.

이때 백월산 아래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와서 우러러 보며 설법해 줄 것을 청하자 두 부처는 불법을 설명하고 나서 구름을 타고 사라졌다고 한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경덕왕이 절을 창건했는데, 바로 이 절이 남사라고 한다. 지금은 절 터만 남아 있다.

[변천]

기록에 의하면 755년(신라 경덕왕 14) 이성(二聖)의 성도(聖道) 소식을 듣고 757년 사자를 보내어 큰절을 세우게 하고 이름을 백월산 남사라 하였다고 한다. 7년 뒤 절이 완성되자 미륵존상(彌勒尊像)을 만들어 금당(金堂)에 모시고 그 편액에 ‘현신성도무량수전(現身聖道無量壽殿)’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현황]

남사는 절 터 인근에 분포하고 있는 기와편과 탑재 등으로만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백월산(428m) 남쪽 일대 완만한 대지상에 위치하고 있는 남사지는 현재 계단식 논으로 경작되고 있다. 동쪽으로는 계곡이 남쪽으로 흘러내리고 있고, 계곡 좌우로 작은 암자들이 들어서 있다.

논과 계곡 일대에서는 다량의 기와편과 ‘남사(南寺)’라 새긴 명문기와 등도 출토된 바 있다. 또한 1982년 탑신석과 옥개석 각 1매가 발견되었고, 팔각간주형석등(八角竿柱形石燈), 치미 1점, 마애석불좌상 1구 등은 현재 백운암(월백리 소재)에서 확인된 바 있는데, 이들은 모두 남사지에서 가져다 놓은 것이라 한다. 특히 석등은 통일신라 양식을 반영하고 있어 남사의 창건 연대와도 부합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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