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301871
한자 記錄遺産
영어의미역 Record Inheritance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칠곡군
시대 고려/고려,조선/조선,근대/근대
집필자 이갑규

[정의]

경상북도 칠곡군에 있는 선조들이 문자로 기록해 놓은 문집, 문서 등의 기록물.

[개설]

흔히 우리는 우리의 선조들을 일컬어 기록을 남겨 후세에 전하는 일에 미흡했다라고 쉽게 말한다. 이는 우리가 잘못 선조들을 이해하고 있는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돌이켜보면, 우리나라 선조들만큼 기록에 철저하며, 알고 있는 부분을 후세에 전하고자 집착한 민족이 세계적으로 보아도 잘 없었음을 우리는 간과하고 있다. 우리 선조들이 남긴 문집(文集)을 살펴보면 가정에서 자녀들을 교육한 작은 일에서부터 독서한 소감과 평론에 이르기까지 기록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잘못된 인식이 되어 있는가를 짚어보면 우리의 기록은 모두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고 광복(光復)이후에는 한글 전용 교육을 실시해온 결과로 우리 선조들의 기록이 있어도 잘 살피지를 못하고 있는 점을 들 수 있다.

[현황]

우리는 일제의 식민지화 정책에 의하여 우리 선조들의 정신을 부정하거나 유산을 소홀히 관리해온 점을 들 수 있다. 거기에다가 미국을 종주국으로 삼으면서 서구 문화에만 편향된 연구를 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여태껏 우리의 기록들은 중앙에서 관리해왔거나 지방관아 내지는 문중에서 관리해온 것 이외에는 모두 흩어져 버렸다. 중앙에서 관리한 문서나 서책들도 열강들의 외침에 뺏기고 전쟁의 병화에 소실되는 재앙을 면치 못하였다. 이는 우리 민족의 가슴 아픈 역사들이다. 다행히 광복 이후 반세기가 흘러서야 이제 겨우 일반 동산(動産) 문화재의 다량 소장처를 파악하여 목록 정리 등 기초 작업을 하고 있긴 하나, 우리 선조들의 정신이 무엇이었으며 그나마 남아있는 기록들이 어떤 내용인지 파악하기에는 아직도 긴 세월을 요하고 있다.

[칠곡의 기록유산]

고려시대의 기록들은 거의가 임진왜란이란 병화를 거치면서 남아 보존된 경우가 극히 드문 것이 우리나라 전역의 현황이다. 대체적으로 조선시대 기록들을 꼽을 수 있는 실정이며 칠곡군 또한 예외일 수가 없다. 다음은 칠곡군의 주요 기록 유산에 관한 설명이다.

벽진이씨 문중 민묘(民墓)에서 발견된 필사본의 만장(挽章)은 임진왜란 이전의 유산(遺産)으로, 1991년 5월 13일 칠곡군 북삼읍 인평리 산 173-4번지에 소재한 벽진이씨 문중의 민묘를 이장할 때에 발굴된 유물들이다. 만장은 조선시대 명종(明宗)선조(宣祖) 조(朝)에 활동한 인물인 김귀영(金貴營), 김경창(金慶昌), 권응인(權應仁) 등이 지은 글들이 포함되어 있다. 묘지의 시대는 1585년(선조 18) 경이며 피장자(被葬者)는 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이공(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李公)이다.

만장은 죽은 자를 애도 하고 고인과의 지내던 정을 회고하여 명복을 빌어주는 시(詩)의 문체이다. 만장은 지금도 쓰고 있는 것으로 생활 속에서 흔히 접하는 글들이다. 지금도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글이 400여 년 전의 묘지에서 그대로 출토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기록 유산 중에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불행하게도 파손되거나 습기에 종이가 손상되어 완전히 해독할 수 없음이 안타깝다. 특히 권응인의 글은 『송계집(松溪集)』에 남아 전하고 있다. 유물들은 현재 경북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다음으로 ‘동래정씨 족보 판목’을 들 수 있다. 족보란 본래 혈통을 밝혀 종족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제작된 서적이다. 칠곡군 지천면 연호리 동래정씨의 재실 존경당(尊敬堂)의 동래정씨족보판각(東萊鄭氏族譜版閣)에 소장되어 있는 242매 중 11매가 결판된 판목은 우리민족이 혈통보존을 위하여 얼마나 노력해 왔는가를 증명해 주는 귀중한 유산이다. 동래정씨 문중에는 1655년(효종 6)에 판각된 ‘을미보(乙未譜)’와 1716년(숙종 42)에 판각된 ‘병신보(丙申譜)’가 보존되어 있는데, 을미보는 고령의 이로재(履露齋)에 보관되어 있고 병신보는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에 소재한 존경당에 보관되어 있다. 결판된 11매 이외에는 보관 상태가 양호하여 현재까지는 한 점의 손색이 없는 유산이다.

또한 양졸재(養拙齋) 『정수선생실기』가 있는데, 실기란 본래 주인공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못하거나 원고가 유실되었을 때, 문헌을 통하여 증명해놓으려는 기록 문서이다. 동래정씨 문중 재실 존경당의 판각(板閣)에는 양졸재 정수 선생의 실기(實紀)도 보관되어 있다. 1849년에 제작된 양졸재 정수 선생의 실기는 판목이 완전하게 보존되어 손실이 없으며 상태도 양호하다. 양졸재 정수한강(寒岡) 정구(鄭逑)의 제자이며 당대의 석학이었다. 불행하게도 43세에 생애를 마친 인물이다.

한편 칠곡에는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 낙촌(洛村) 이도장(李道長), 귀암(歸巖) 이원정(李元禎), 정재(靜齋) 이담명(李聃命), 묵헌(黙軒) 이만운(李萬運)으로 한 집안의 가학(家學)이 자자손손 이어진 집이 있다. 아들 한세대에 이어지기도 어려운 것 인데, 대를 이어 가학(家學)이 이어졌다는 것은 반드시 그 집안만의 정신이 특별히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귀암 이원정의 종손 이필주는 소장된 도서를 대구가톨릭대학교 도서관으로 넘겨 현재 가톨릭대학교에서 보관하고 있다. 그 중 귀중본은 1659년(효종 10)에 간행된 「용비어천가」와 1632년(인조 10)에 간행된 『두시언해(杜詩諺解)』, 1677년(숙종 3)에 간행된 『박통사언해(朴通事諺解)』, 1656년(효종 7)에 간행된 『사성통해(四聲通解)』, 18세기 초로 추정되는 필사본 「조선팔도지도」 등을 꼽을 수 있다.

[기록유산의 관리]

아직도 선조들의 기록이 목록도 파악되지 못한 것이 수 없이 존재하고 있다. 개인의 문집 같은 경우 자손이 보관하고 있거나 연원가(淵源家)에 보관되어 있는 몇 부들이 도서목록에 등재되지 못한 채 사장(死藏)되어 있다. 따라서 자료를 꾸준히 발굴하는 작업이 절실하다. 행여 외국으로 흘러가버린 경우에는 목록이 없으므로 없어진 것조차도 모르는 경우가 있다. 대학이나 기관의 도서관에 소장된 도서들의 해제 작업도 시급하다. 우선 일차적인 작업으로 흩어져 있는 민간의 문헌에 대하여 목록화하는 것과 수집된 도서들의 해제 작업이 절실하다. 우리 선조들은 일상생활의 하찮은 일 하나까지 모두 기록으로 남긴 정신을 오늘에 계승해 나가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