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36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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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忠孝烈 |
영어음역 | chunghyoyeol |
영어의미역 | loyalty, filial piety and fedelity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
집필자 | 최호 |
[정의]
충신과 효자·효부 그리고 열부·열녀의 총칭.
[개설]
1. 충신
강릉에는 많은 충신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강릉 출신으로 나라와 향리를 위하여 헌신한 열두 명을 강릉향현사에 모셔놓고 그 뜻을 기리고 공로를 추모하고 있다. 조은(釣隱) 최치운(崔致雲)을 비롯하여 눌재(訥齋) 이성무(李成茂), 수헌(睡軒) 최응현(崔應賢), 춘헌(春軒) 최수(崔洙), 괴당(槐堂) 김윤신(金潤身), 사휴당(四休堂) 박공달(朴公達), 삼가당(三可堂) 박수량(朴遂良), 원정(猿亭) 최수성(崔壽峸), 임경당(臨鏡堂) 김열(金說), 보진재(葆眞齋) 김담(金譚), 농헌(聾軒) 박억추(朴億秋), 도경(蹈景) 최운우(崔雲遇) 등이 바로 그들이다.
대략 몇 명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조은 최치운[1390~1440]은 19세에 생원에 급제하여 강릉 지방 선비 68명과 함께 임금에게 공장(供狀)을 올려 강릉향교를 중건하게 하였다. 세종 때 최윤덕(崔潤德) 장군과 함께 종사관으로 참전하여 야인을 토벌하였고 명나라 사신으로 가서 그 소임을 다하였으며 관직은 우빈객(右賓客)에까지 이르렀다.
눌재 이성무는 고려 말에 봉익대부 호조전서(奉翊大夫戶曹典書)의 벼슬에 있다가 고려가 망하자 ‘군자불사이군(君子不事二君)’의 대의를 지켜 두문동(杜門洞) 72현(賢)과 뜻을 같이 하여 처가가 있는 강릉으로 내려온 이장밀의 맏이이다. 학문이 깊고 문장에도 뛰어났으나 부친의 절의(節義)를 본받아 과거에 나선 일이 없고 오직 독서와 효우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신하의 도리와 자식의 도리는 조금도 어긋남이 없어 태조와 정종이 돌아가셨을 때는 3년 동안 상주의 예를 갖추었으며 부모가 돌아갔을 때에는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태종은 이성무 선생을 비롯하여 동생인 선무(善茂)·춘무(春茂)·양무(良茂) 등 네 형제에게 정려와 사정(司正)의 벼슬을 내렸다. 그 후 이양무의 후손인 이당(李堂) 형제가 숙종 때 효자 정려를 받았다. 강릉시 교동 군정교 옆에 선생의 네 형제와 이당의 형제의 효행을 기리는 정려각이 있는데, 이름은 ‘영해이씨이세육효지려(寧海李氏二世六孝之閭)’이다.
괴당 김윤신은 1468년 생원에 합격하여 훈도(訓導)의 벼슬을 하였다. 1476년에는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사록(司祿)·전적(典籍)·주부(主簿)·전중감찰(殿中監察)이 되었다. 이때에 선생은 늙은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집에 돌아가게 해달라고 임금에게 빌었다. 임금은 “내가 듣기로 경은 부친의 5년 장병(長病)에 한 번도 옷을 벗지 아니하고 간호하였으니 어찌 대효(大孝)가 아니며 경이 나를 위하여 성심을 다하였으니 어찌 충성이 아니겠느냐!”하면서 금성현령(金城縣令)으로 임명하여 노친(老親)을 봉양하게 하였다. 선생은 만년에 강릉에 내려와 향약을 지어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실행하게 하고 학문과 도의를 장려하고 미풍양속을 기리는데 힘을 쏟았다.
2. 효자
『강릉시사(江陵市史)』에는 효자 75명이 기재되어 있고 『완역 증수임영지(完譯 增修臨瀛誌)』에는 효자 171명이 기재되어 있다. 『동호승람(東湖勝覽)』 권2에는 김석진(金錫晉)을 비롯한 효자 33명을, 권3에는 어촌(漁村) 심언광(沈彦光)의 후손인 심진(沈榛)을 비롯하여 효자 39명과 효행을 행한 사람 8명, 권4에서는 심상익(沈相益)을 비롯한 41명과 효행을 행한 사람 김헌제(金憲濟)를 비롯한 8명이 각각 기재되어 있다 세 권 모두에 겹치는 인물이 있겠으나 다른 여러 항목보다도 효자·효행항목에 인물이 많다는 것은 강릉이 ‘효고을’이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몇몇 효자와 효행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강릉의 대표적인 효자로는 김담의 가문을 들 수 있다. 김담(金譚)은 12향현 중의 한 분으로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과거시험까지 포기하였다. 부친이 병들었을 때는 정성으로 간호하였고 돌아가셨을 때에는 삼년 동안 죽만 먹으며 시묘살이를 하였다. 인종(仁宗)과 명종(明宗)이 죽었을 때에는 3년간 고기류를 먹지 않았고 족척(族戚)이나 친구의 상 때도 행동을 삼가 했다. 가난한 종가(宗家)가 화재를 만나 묘주(廟主)를 모실 곳이 없게 되자 선생이 별묘(別廟)를 지어주고 사당을 받들 위토(位土)까지 종가에 주어 자립하게 하였다. 부사의 충효천거로 부세(賦稅)가 면제되고 여러 번 상직(賞職)을 주었으나 어머니의 봉양을 할 수 없다 하여 받지 않았다. 양사언(楊士彦)이 강릉부사로 와서 여러 번 선생을 천거하였으나 완고하게 사양하였다. 때마침 진부와 대화 두 현에 한해(旱害)가 심하고 설상가상으로 황충(蝗蟲)마저 극성하여 민심이 흉흉했다. 양사언 부사(府使)의 간청에 못 이겨서 진부현에 2년, 대화현에 3년 합하여 5년 동안 두 곳의 현령을 지냈다. 백성을 잘 다스리고 또한 황충도 날아들지 않아 “하늘이 효자를 먼저 알고 이 효자를 도왔다.”고 양사언은 술회하였다.
김담의 아들인 김경황(金景滉)과 김경시(金景時)도 아버지의 효심을 본받아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에 3년 동안 죽만 먹고 시묘살이를 했으며 선조 때에 둘 다 효자정려를 받았다. 김담의 손자이자 김경황의 아들인 김한(金垾)도 역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효성을 닮아 남달리 극진하였다. 아버지가 위독할 때는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마시게 하여 회생하게 하였고 어머니가 병환에 있을 때에는 대변의 맛을 보아 가면서 정성으로 간호했다. 부모상에는 조부(祖父)가 하던 것과 같이 죽만 먹으며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또 다른 효자는 단연 삼가당 박수량[1475~1546]이다. 선생은 12향현 중의 한 분으로 어려서부터 효우(孝友)하고 학문을 즐겼다. 성장함에 따라 문학(文學)과 도의(道義)에 통달했으나 뜻이 고결하여 세상일에는 개의치 않았다. 어느 날 어머니가 과거에 붙은 친구를 부러워하자 1504년(연산군 10) 30세의 나이에 생원과 진사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했다. 그러나 대과(大科)에는 응시하지 않았다. 때마침 연산군이 단상제(短喪制, 3년 상을 1년 상으로 하게 한 법)를 엄격하게 시행하는 때에 어머니를 잃었다. 선생은 결연히 말하기를 “차라리 쇠망치로 맞아서 죽을지언정 선왕 때부터 지켜온 법은 어길 수 없다.”고 하여 여묘(廬墓)로 3년 상을 치렀다. 이 일로 인하여 중종이 왕위에 오른 3년 째 해인 1508년 생시에 효자정려를 받았다. 1518년(중종 13) 선생은 대신들과 명현(名賢)들의 추천으로 현량에 올랐다. 그리하여 충청도사(忠淸都事)로 부임해서 도연명의 시집을 간행하여 널리 읽히게 하였다.
3. 효부 및 열부·열녀
『강릉시사(江陵市史)』에는 조강진(曺綱振)의 처 최씨(崔氏)를 비롯하여 85명의 효부열녀가 기재되어 있고 충노(忠奴) 7명도 아울러 기재되어 있다. 『완역 증수임영지(完譯 增修臨瀛誌)』에는 박구호(朴龜鎬)의 처 장씨(張氏)를 비롯하여 효부(孝婦) 8명, 최세창(崔世昌)의 처 김씨를 비롯하여 77명의 열부(烈婦), 충노 7명 등이 기재되어 있다. 『동호승람(東湖勝覽)』 권2에는 고검(高儉)의 처 권씨를 비롯하여 4명의 효부를, 김몽상(金夢相)의 처 강릉김씨를 비롯한 11명의 열부를, 권3에서는 김윤수(金潤洙)의 처 삼척김씨를 비롯한 27명의 열부를, 권4에서는 박래우(朴來祐)의 처 강릉최씨를 비롯한 5명의 효부와 효행을 행한 두 사람이 각기 기록되어 있다. 또한 최종집(崔宗集)의 처 삼척김씨를 비롯하여 30명의 열부(烈婦)와 열행(烈行)을 행한 최대하(崔帶河)의 처 선산김씨 9명이 각기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효자 못지않게 효부와 열부·열녀가 많은데 몇몇 효행의 사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권처직(權妻直)의 처 김씨는 권처평의 처 최씨와 동서의 사이로 함께 왜란을 피하려던 중에 적을 만나 최씨와 함께 벼랑에 떨어져 절개를 지켰다. 『임영지(臨瀛志)』의 「정렬편」에는 적이 김씨를 욕보이려고 하자 김씨가 적의 칼을 빼앗아 자살을 하려 했으나 적이 김씨의 팔을 잡고 서로 실랑이를 하는데 김씨가 크게 꾸짖고 저항하니 적이 김씨를 베어 죽였다고 한다. 이진삼(李鎭三, 『임영지(臨瀛志)』「정렬편」에는 先三임)의 처는 남편이 어느 해 동네 사람들과 함께 배로 장삿길을 떠났다. 그런데 그 배가 영해(寧海) 축산포(丑山浦) 앞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파선(破船)하여 남편을 잃었다. 뒤늦게 남편의 죽음과 시체도 못 찾았다는 소식을 들은 부인은 그날로 배를 타고 축산포로 갔다. 며칠을 거친 바다를 뒤져 마침내 남편의 시신을 찾아냈다. 부인은 남편의 시신을 집으로 싣고 와서 밤낮으로 곡을 하며 빈소에서 자더니 끝내는 자결하고 말았다. 이러한 열행(烈行)을 가상히 여겨 부영(府營)에서는 특별히 부의(賻儀)를 보내고 잡역(雜役)을 면제시켰다.
[의의와 평가]
강릉은 문향과 예향의 도시로 예부터 불려왔으며, 충신과 효자·효부가 많은 고장으로 소문이 나있다. 충신들은 자신의 직무에 최선을 다하였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울러 모두 효자였다. 부모님을 위해서라면 관직도 버리고 달려오고 출사를 거부하였으며 모든 정성을 다하였다. 아내들도 역시 시부모와 남편의 뜻을 받들기라도 하듯 부모님과 남편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치고 때로는 귀중한 생명까지도 바쳤다. 오늘날까지 강릉사람이 효성스럽고 부부지간과 가정이 화목한 것도 이들이 남긴 교훈이요 자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