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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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미역 | The Music and Motions of Gimcheon, Geumneung Binnaenongak (Farmers' Music of Geumneung) |
이칭/별칭 | 빗내풍물 |
분야 |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광천리 1044|519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문재원 |
[금릉빗내농악은 감문국에서 시작되었다]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광천리 빗내마을은 김천시에서 선산 방향으로 12㎞ 거리에 위치한다. 지방도에서 개령들 한복판을 가로 질러 1㎞ 남짓 더 들어가면 감문산을 주산으로 하는 사달산 기슭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마을로, 김녕 김씨와 진주 하씨 등 88가구가 의좋게 살고 있다.
감천 변에는 김천의 곡창지로 불릴 만큼 넓고 비옥한 개령들이 펼쳐져 있는데, 이 때문에 일찍부터 나라가 섰으니, 그것이 바로 삼한 시대 김천 지역 소국인 감문국(甘文國)이다. 감문국은 변한계 12국 중의 하나로 빗내마을을 포함한 개령면 일대를 중심으로 들어섰다가 서기 231년 신라의 전신인 사로국에 멸망한 왕국이다.
지금도 이웃한 동부리 일대에 옛 궁궐 터와 성터가 남아 있으며, 군사를 동원할 때 군호(軍號)를 올렸다고 전하는 취적봉(吹笛峰)과 북을 울렸다는 당고산, 군사를 조련했다는 진대골, 세자가 살았다는 세자궁터 등의 지명과 감문국 공주와 신라 청년과의 사랑 이야기가 서려 있는 애인고개 등 곳곳에 지명과 전설이 남아 있다. 빗내마을에는 감문국의 장군으로 신라에 맞서 싸운 원룡장군이 어릴 때 마셨다는 원룡장군샘이 사달산 중턱에 지금도 남아 있다.
빗내마을은 감천 유역에 위치해 비옥한 토질과 풍부한 수량이 조화된 개령들을 기반으로 하여 고대로부터 취락을 이루어 온 전형적인 농촌이다. 이곳에서는 대대로 빗내농악이라 불리는 풍물놀이가 전래되어 오는데, 이것은 감문국이라고 하는 특징적인 역사가 투영된 농악이다. 우리나라 농악의 대부분이 농사굿인 데 비하여 빗내농악은 군사굿 또는 진굿으로 전승되어 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감문국이 감천을 경계로 가야와 상주의 사벌국, 경주의 사로국 등 주변 소국들과의 오랜 전쟁 과정에서 군사를 조련하고 국운을 건 전투와 개선하는 과정들이 풍년과 감천의 범람을 경계하고 기원하는 나라 제사와 결합되어 동제(同祭) 형태로 전승되어 온 것이 오늘날의 금릉빗내농악이라는 것이다. 최근까지도 빗내마을에서는 음력 1월 6일이면 동제를 올리고 풍물놀이와 줄다리기를 하면서 전쟁을 하듯 힘을 겨루는 두 가지의 진(陣)놀이가 행해졌다고 한다.
[금릉빗내농악의 편성과 복색]
원래 빗내농악은 인원의 제한이 없었다고 한다. 몸짓과 눈짓으로 할아버지부터 아버지, 손자로 말없이 이어져 온 자연발생적인 농악이기에 남녀노소를 불문했고, 흥에 겨우면 누구나 풍물꾼이 되는 것이다. 동제와 같은 행사시에는 보통 한 가구당 한 명씩 동원되어 놀이패가 구성되는데, 농악기는 쇠로 불리는 꽹과리 네 명, 징 네 명, 북 여덟 명, 장구 여덟 명, 소고 열여섯 명, 농기 한 명, 영기 두 명, 대감·각시·포수 등 잡색 세 명으로 구성된다.
진굿에서 유래된 관계로 빗내농악에서는 이들 대원을 여덟 명 규모의 분대 병력으로 보는데, 꽹과리와 징 각 여덟 명, 북 여덟 명, 농기·영기·잡색이 1개 분대이고, 소고 열여섯 명이 2개 분대 등 총 6개 분대가 농악단을 이루고 있는 구조이다. 복장은 통상 흰 저고리와 흰 바지에다 행전을 하고 쾌자라 불리는 조끼를 입어 홍색·황색·녹색 등 삼색을 만들고, 머리에는 전립과 흰 꽃으로 장식된 고깔을 쓰는데, 특히 상쇠는 쇠채에 오색의 천을 달아 총지휘자임을 나타낸다.
[금릉빗내농악을 이끌어 온 상쇠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빗내농악의 역사는 삼한 시대 감문국에서 유래되었으며, 이후 자연적인 전승 형태로 이어 온 까닭에 체계적인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구전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다. 관계자들의 증언을 종합해 볼 때 빗내마을 주민들을 중심으로 동제와 별신굿, 마을 행사 등을 기해 산발적으로 이루어져 오던 빗내농악이 나름의 풍물완 형태로 정비된 시기는 일제 강점기 중엽으로 보고 있다.
1대 상쇠로 일컬어지는 정재진은 김천시 남면 부상리 출신으로, 구미시 선산읍 무을리 오가동의 수다사 승려로서 풍물굿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제2대 상쇠 이군선은 구체적인 출신지를 알 길은 없다. 이군선은 수다사에서 정재진의 조력자로 함께 생활하다 정재진으로부터 풍물을 전수받은 후 무을리 오가동 주민과 빗내마을 주민들을 인솔해 본격적인 빗내풍물을 활성화했던 인물로 알려진다. 제3대 상쇠 윤상만에 이르러 상쇠의 빗내마을 시대가 열리게 된다. 광복 후엔 윤상만이 잠시 상쇠를 맡았다가 우윤조, 이남문, 김홍엽으로 이어진다. 제7대 상쇠 한기식은 1972년 김홍업의 뒤를 이어 2004년까지 상쇠를 맡는다. 손영만은 2004년부터 현재까지 제8대 상쇠를 잇고 있다. 빗내농악은 이처럼 한 세기 가까이 분명한 상쇠의 계보를 잇고 있는 전국 유일의 풍물이다.
[금릉빗내농악의 내용과 가락]
빗내농악의 놀이 내용은 12가락, 119마치로 나뉘어져 있는데, 크게 질굿·문굿·마당굿·반죽굿·도드레기·영풍굿·허허굿·기러기굿·판굿·채굿·진굿·지신굿으로 구성된다. 빗내농악은 감문국 군사들의 훈련과 전투 과정에서 유래된 관계로 일반적인 농사굿에서는 볼 수 없는 경쾌하고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이런 연유로 빗내농악을 가리켜 진풀이라고도 한다.
빗내농악은 12가락의 굿판이 명확한 차이를 가지면서 마치라 불리는 잔가락의 종류도 다양한 것이 또 다른 특징이다. 12가락 119마치 중 첫 번째인 질굿은 쇠에 맞추어 모든 풍물꾼이 덩실덩실 춤을 추며 행진하는 가락이다. 두 번째 가락인 문굿은 풍물꾼의 내방을 알리는 신호 격으로, 상쇠가 입장할 때 또는 대문 앞에서 “주인 나그네 들어가요.”라고 소리치며 주위에 풍물꾼의 도착을 알리는 가락으로 3마치로 구성되어 있다.
마당굿은 마당에 들어서서 놀이 과정을 준비하는 가락으로서 원형을 그리며 정열하고, 쇠에 따라 전 풍물꾼이 관중에게 정중히 인사하는데 4마치로 이루어져 있다. 이때부터 빗내농악 특유의 군사 조련의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반죽굿은 6마치로 이루어진다. 상쇠와 종쇠의 가락에 따라 전 풍물꾼이 놀이에 들어가는 가락인데, 상쇠와 종쇠가 서로 이동하면서 전체 대원들의 사기를 돋우며 놀이 준비를 시킨다.
도드레기는 12마치로 이루어지며 상쇠와 종쇠가 노래에 맞추어 쇠를 치면 전 풍물꾼은 쇠가락에 맞추어 노는 가락이다. 상쇠가 각 배역마다 농기와 복장, 기타 놀이에 들어갈 준비가 완벽하게 갖추어졌는지를 점검하는 가락으로, 점검이 모두 끝나고 상쇠가 흡족해하면 모든 풍물꾼이 신명나게 뛰어 논다. 이 가락은 전투에 들어가기에 앞선 대장이 각 부대원들의 무장 상태를 점호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 보면 된다.
영풍굿은 가장 긴 28마치로 이루어진다. 상쇠와 종쇠가 영풍대를 치면 소고는 가락에 따라 여러 번 엎드려 자기의 장비가 이상 없음을 자랑하고, 이때 꽹가리와 징을 그치면 북과 장구가 신명나게 치며 자기의 장비가 이상이 없음을 과시한다. 일곱 번째 가락인 허허굿은 12마치로 구성되며, 상쇠가 가락을 치다가 “허허” 하고 소리를 지르면 전 풍물꾼이 이상 없음을 답하면서 신나게 논다. 기러기굿은 18마치로 이루어지며, 이상 유무를 확인한 상쇠가 흥이 나서 기러기 가락을 치고, 이때 전 풍물꾼은 옆으로 뛰며 장구·소고는 채북을 추켜잡고 양팔을 기러기 모양으로 벌리고 덩실덩실 춤을 춘다.
판굿은 아홉 번째 마당으로 18마치로 이루진다. 상쇠의 지휘에 따라 원을 풀면서 꽹과리와 징, 북, 장구, 소고가 각기 작은 원을 그리면서 5방진을 친다. 이어 전 풍물꾼이 양쪽으로 갈라선 굿판 가운데서 북놀이, 장구놀이, 소고놀이 순으로 판굿을 논다. 채굿은 12마치로 이루어지는데 상쇠와 종쇠의 젯북가락에 맞추어 소고 두 사람이 나와 앉은 채 수박치기[手拍치기]를 한다. 이때의 수박치기는 적군과의 맹렬한 전투를 상징한다.
열한 번째 마당인 진굿은 6마치로 이루어지는데 치열한 전투 끝에 적을 포위하여 섬멸하는 놀이로서 상쇠와 종쇠가 각각 대장이 되어 두 편으로 나누어 진을 치고 격전을 벌인 후 상쇠가 진을 풀면 모든 풍물꾼은 한데 어울려져 덧배기 가락의 춤굿으로 흥청거리며 흥을 돋운다. 마지막 가락인 지신굿은 상쇠의 인솔에 따라 모든 풍물패가 한판 흐드러지게 노는 마당판을 의미하며, 이 굿이 끝나면 놀이, 즉 전투가 끝났음으로 각기 헤어져 집으로 돌아간다.
[빗내농악의 보존과 전승을 위한 노력]
김천시에서는 김천 지역 역사와 사람들의 삶이 녹아 있는 빗내농악의 보존과 전승을 위해 빗내농악전수관을 건립하고, 빗내농악 전승 학교 지정 사업을 전개하며, 빗내농악 경연 대회를 개최하였다. 또한 빗내농악보존회 지원 등 다방면에 걸친 지원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빗내농악전수관은 2003년 11월 빗내농악의 발상지인 개령면 광천리 빗내마을 입구에 건립되어 광활한 개령들과 감천 내를 굽어보고 있다. 부지 면적 3388㎡에 지상 2층 규모의 전시실과 연습실, 숙소, 야외 공연장을 갖추고 연중 빗내농악 전승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또 개령초등학교와 직지초등학교, 김천농공고등학교를 빗내농악 전승 학교로 지정하여 우리 청소년들에게 빗내농악을 전승하기 위한 새내기 교육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아울러 2004년부터 빗내농악 경연 대회를 개최하여 읍·면·동별로 빗내농악이 생활 농악으로 정착되고 농악의 기량을 체계적으로 연마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빗내농악의 체계적인 연구와 선양에 앞장서고 있는 빗내농악보존회의 공로도 빼놓을 수 없다. 빗내농악보존회는 1984년 12월 빗내농악이 ‘금릉빗내농악’이란 이름으로 경상북도 무형 문화재 제8호로 지정됨과 동시에 창단된 후 전국의 풍물 대회와 각종 행사에 참가하여 김천 농악의 우수성을 알리고 있다. 그동안 1961년 제2회 민속 예술 경연 대회 대상, 1984년 제25회 전국 민속 예술 경연 대회 우수상, 1999년 제25회 대사습놀이 전국 대회 장원, 2004년 제6회 김제 지평선 축제 전국농악 대회 대상, 2006년 제47회 한국 민속 예술 축제 농악 대회 금상 등 전국의 크고 작은 풍물 대회를 석권했다. 빗내농악은 2019년 9월 2일 '김천금릉빗내농악'이란 이름으로 국가 무형 문화재 제11-7호로 지정되었으며, 빗내농악보존회가 관리단체로 인정되었다.
[영원한 빗내풍물꾼 한기식의 삶]
금릉빗내농악의 대부로 불리는 7대 상쇠 한기식은 요즘 다리가 아파 놀이에도 참가하지 못한다고 아쉬워했다. 2010년 81세가 된 한기식은 고된 농사일에 연신 전국을 돌면서 풍물을 치느라 몸을 혹사해서 그렇다고 말한다. 1930년생인 한기식은 12세 되던 해인 1942년부터 풍물을 했다. 내리 69년 동안이나 풍물잽이를 한 것이다.
“어느 날인가 학교 갈려고 책보를 메고 나오는데 4대 상쇠를 했던 우윤조 형님이 다짜고짜 사람이 모지란다고 풍물치는 데 따라 가자고 카대. 그길로 바로 풍물꾼이 되었는기라.”
24세에 제1대 상쇠인 정재진이 살던 무을 오가동의 조용분과 결혼했는데, 농사일은 안 하고 풍물만 치러 다닌다고 부인과의 사이에 다툼도 많았다고 한다.
“열두 살 때 학교도 빼먹고 풍물 치러 다닌답시고 아버지, 어머니한테 혼도 많이 났는데 결혼하고 집사람도 그렇게 반대합디다. 그래도 안 돼. 신이 들었는지 중독이 됐는지 꽹과리를 못 놓겠더라 말이지. 후회는 없어.”
빗내마을 큰 풍물꾼 한기식의 말 속에는 아직도 풍악에 대한 열정이 뜨겁게 남아 있었다. 그래서일까, 영원한 풍물꾼 한기식의 어깨 뒤로 솟은 빗내농악전수관이 더 없이 흥겨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