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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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미역 | Gimcheon, a City of Sports |
분야 | 문화·교육/체육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문재원 |
[역사 속의 김천 체육]
역사적으로 김천 지역에서 기록된 체육 활동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700년 전 어느 여름날 감천에서 벌어진 감문국 군사들의 수영으로 볼 수 있다. 『동사(東史)』에 감문국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킨 아포를 징벌하기 위해 감천을 건너다가 물이 너무 깊어 중간에서 헤엄쳐 돌아왔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이와 같이 중세 이전의 체육은 군사들의 신체 단련의 일환으로 전개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수년 전까지 김천농공고등학교에서 행해졌던 장치기와 김천 지역을 대표하는 풍물인 금릉빗내농악도 군사 훈련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또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포읍 대신리와 개령면 동부리, 봉산면 예지리와 신리, 대항면 용복리와 신평리 주민들 간의 줄다리기도 체계화되지는 않았으나 일종의 체육 활동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조선 후기부터 김천장이 섰던 감호동 감천 백사장에서는 전국 규모의 씨름대회가 자주 열렸고, 이 때문에도 김천 씨름의 명성은 일제 강점기 말까지 이어졌다.
조선 후기와 개항기 서양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김천 지역 교회와 성당에서 일부 서양식 운동이 보급되기도 했으나 본격적으로 근대적인 의미의 체육이 태동된 것은 1895년 고종의 교육입국 조서 발표 이후이다. 이를 계기로 전국에 학교가 설립될 때, 김천 지역에서는 1907년 지례군수 김황진이 세운 일중소학교를 시발로 1910년까지 16개 소의 학교가 건립되었다. 이때 각 학교마다 교과목에 학생들의 신체 단련을 위해 체육을 넣게 되었고, 운동회를 개최하면서 체육과 운동 경기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었다. 특히 학교 연합 운동회와 학교 대항 경기가 이루어지면서 체육에 대한 지역민의 관심도 고조되었다.
그러나 1909년 4월에 학교 연합 운동회가 중단되었는데, 이는 일제가 학교 체육이 민족 운동으로 발전되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이후 침체 일로에 있던 김천 체육은 1921년 10월 31일 김천공립보통학교와 금릉청년회 주최로 가을 운동회가 열린 것을 시작으로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동아일보』는 이날의 운동회를 주요 기사로 보도하며 기사 말미에 “수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쓰고 있다. 운동회를 주관한 금릉청년회 산하의 체육부는 김천 지역 최초의 체육 단체로, 일본 사람들이 조직한 김천체육회와 쌍벽을 이루며 지역 체육계를 이끌었다.
김천체육회가 1922년부터 전국 규모의 조선 육상 경기 대회를 7회까지 개최하자 철육회(鐵育會)라는 단체가 조직되어 체육 운동회를 개최하려 했으나 김천경찰서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923년에는 김천·지례·아천·봉계·구미 등에 위치한 보통학교와 금릉유치원·후바다유치원이 공동으로 운동회를 열었고, 김천고등보통학교에서도 대운동회를 열었다.
1933년에는 김천 지역 음식점과 여인숙 조합 주최로 체육 대회가 열렸으며, 1934년 1월 22일에는 김천고등보통학교가 극장 김천좌에서 남조선 역기 대회를 개최하였다. 1936년 5월 29일에는 김천체육협회가 창립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학교 운동회 중심의 체육 활동이 사회·일반 체육으로 확산되었다. 당시 『동아일보』에서는 “김천체육회가 고덕환, 박완, 김성문, 심상민, 타카다, 아베, 미쓰모토 등 39인의 평의원으로 조직되었다.”라고 보도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말인 1940년 경북 체육 대회에 김호건·이건배·윤삼출 등이 김천 체육을 대표하여 출전하면서 김천 출신 체육인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기 시작하였다. 1945년 광복 후 크고 작은 체육 단체들이 난립해 혼란이 가중되자 통합 여론이 높아졌고, 이에 1946년 6월 5일 김천군청 회의실에서 군수 심문과 김호건·백태진·홍윤식·박성기 등이 주동이 되어 김천군내 군소 체육 단체를 통괄하기로 합의하고 김천체육회 결성대회를 열었다. 당시 회장에 심문, 부회장에 김은배·김종만, 이사장에 홍윤식, 총무부장에 백태진을 선출하고 산하에 각 부를 두었다.
또 광복을 기념하는 체육 행사가 자주 열렸는데, 1946년부터 지례 5개 면 대항의 축구 대회가 열려 전국적인 관심을 모았다. 1949년 김천체육회는 각 부를 연맹 체제로 개편하고 회장에 시장 유석영, 부회장에 경찰서장 전득수와 김은배, 이사장에 백태진, 상무이사에 김호건 외 여섯 명, 감사에 박성기 외 두 명을 선출하고 경상북도 체육회에 가입했다.
그러던 중 6·25전쟁이 일어나 한동안 체육 단체들도 혼란을 겪다가 1957년 4월 체육회가 민간 구조로 개편되어 회장에 김천문화원장 강중구, 부회장에 조필호·백태진·홍윤식·박성기·김호건, 이사장에 백태진·김호건이 차례로 선임되었다. 1963년부터 경북도민체전이 시작되자 김천시에서는 350명 규모의 대규모 선수단을 출전시켜 3위를 거두면서 위상이 크게 높아졌으며, 이후 구기 종목의 경기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매년 9월 체육 대회를 열기로 했다.
1964년 개편된 체육회 임원진은 그동안 중단되었던 김천 씨름의 부활을 위해 같은 해 8월 감천 백사장에서 전국 남녀 씨름 장사 대회를 열었다. 전국의 씨름꾼들이 참가하여 4일간 밤낮으로 계속된 대회에서 김천의 김기수가 우승해 김천의 씨름 열기가 다시 이는 듯했으나 여러 사정으로 다시 중단되고 말았다.
한편으론 1961년부터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학도호국단이 설치되면서 김천지구학도체육대회가 시작되었고, 1966년 4월 2일 김천중학교와 김천고등학교 운동장에서 김천·성주·구미·선산·왜관·칠곡의 45개 중학교와 고등학교 학생들이 참가한 가운데 제5회 대회가 열려서 성황을 이루었다. 1968년에는 김천체육회와 학도체육회가 김천시 체육회로 통합된 후 매년 시민 체육 대회를 개최하였다. 김천시 체육회는 1964년부터 시민들의 염원인 공설운동장 건립을 위해 노력해 왔는데, 오랜 시행착오 끝에 1978년 준공되어 김천 체육의 삼락동 시대를 열었다.
1995년 시·군 통합 후 김천시에서는 현대적인 종합 운동장 건립을 시정의 역점 사업으로 정하고 전국 규모의 체육 행사 유치를 목표로 행정력을 집중하였다. 그 결과 1996년 종합 운동장 건립에 들어가 4년여의 공사 기간을 거쳐 2004년 4월 3만 명이 수용 가능한 국제공인 규모의 종합 운동장을 준공하여 제38회 경북 도민 체전을 성공리에 개최하였다. 또한 2006년에는 중소 규모의 도시에서 전국 최초로 전국 체육 대회[제87회]를 유치하여 역대 가장 성공적인 대회로 개최하면서 김천 체육의 저력을 만방에 과시했다.
[선진 체육 기반 시설을 확충하다]
1995년 지방 자치 출범을 계기로, 시 승격 50년이 넘도록 도민 체육 대회 한 번 개최하지 못한 김천 체육의 현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에 김천시에서는 체육 기반 시설 확충과 전국 및 도 단위 대회 유치에 행정력과 체육 단체의 역량을 집중하기로 했다. 우선 열악한 종합 운동장을 대신할 초현대식 종합 운동장 건립을 위해 중앙 정부와 경상북도, 각급 기관을 상대로 노력한 끝에 3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국제 공인 수준의 현대식 종합 운동장을 2000년 4월 준공하기에 이르렀다.
김천 체육의 메카로 자리 잡은 삼락동 김천종합스포츠타운은 1996년부터 2006년까지 김천종합운동장과 보조경기장, 김천실내체육관, 김천실내수영장, 김천사격장, 김천국궁장, 김천인라인롤러경기장, 김천실내테니스장 등 삼락동 일대 35만 6513㎡의 부지 면적에 4만 1058㎡의 건축 면적을 보유한 전국 최대 규모의 종합 스포츠 단지로 조성되었다.
김천종합운동장은 김천시 삼락동 488-1번지에 부지 면적 20만 7699㎡, 연면적 1만 5000㎡로 1996년 12월부터 2000년 4월 15일까지 총 사업비 380억 원을 투입하여 3년여의 공사 끝에 수용 인원 최대 3만 명 규모로 완공되었다. 주경기장은 3만 6300㎡로, 400m 트랙 8라인, 보조경기장은 140m 길이의 6라인이 설치되었다. 또 김천실내체육관은 전국 체육 대회 농구와 배드민턴 경기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2001년 12월 기공식을 가진 후 2005년 5월 6일 3년 6개월간의 공사 끝에 준공되었다. 김천실내체육관은 부지 면적 4만 3020㎡에 연면적 1만 5636㎡의 지상 3층, 지하 1층 규모로, 최대 8,000여 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국제 공인 규격의 주경기장과 연면적 2,351㎡에 500석의 관중석이 완비된 보조 경기장으로 구성된 초현대식 다목적 체육관이다.
그동안 시 관내에 변변한 실내 체육관이 없어 각종 실내 스포츠 경기 관람 기회가 전무했을 뿐만 아니라 시민의 생활 체육 공간도 많이 부족하여 시민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은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국제 공인 경기장 규모의 실내 체육관이 건립됨으로써 농구와 배구, 핸드볼, 체조, 씨름 등 각종 실내 체육 행사는 물론 국내외 주요 경기를 유치할 수 있어 수준 높은 경기를 관람할 수 있게 되었다. 주요 시설로 주경기장·보조 경기장·생활체육실·관리실·전기실·방송실·조명실·매점 등이 있는데, 개최가 가능한 경기 종목으로는 농구·배구·배드민턴·탁구·핸드볼·체조 등이다.
김천실내수영장은 330억 원의 예산으로 2004년 11월부터 2006년 5월까지의 공사 끝에 면적 1만 2578㎡,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1,500석의 관중석을 갖추었다. 2006년 제87회 전국 체육 대회 중에 수영·다이빙·수구·수중발레 등 4개 종목의 경기가 치러졌는데, 자연 채광 및 환기 시스템을 도입한 자연 친화적이고 에너지 절약형의 쾌적한 경기장으로 경기력 형상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천실내수영장은 시민들에게 개방되어 누구나 저렴한 비용으로 수영 등 각종 생활 체육 시설로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주요 시설로는 경영풀 50m 10레인, 다이빙장 등이다.
김천인라인롤러경기장은 49억 원의 예산으로 2005년 10월부터 2006년 9월까지의 공사 끝에 2만 8250㎡ 부지에 건축 연면적 2,000㎡, 경기장 5,000㎡, 관중석 500석 규모로 완성되었다. 부대시설로 샤워장, 탈의실, 화장실 각 1동이 있다.
김천실내테니스장은 2005년 10월부터 2006년 9월까지 73억 원의 예산을 들여, 기존의 협소하고 노후화된 테니스장을 철거하고 현대식 최신 시설로 건립되었다. 부지 3만 5540㎡, 경기장 1만 5000㎡, 케미컬 코트 20면, 관중석 1,386석 규모로, 단일 코트로서는 전국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또 전 코트에 야간 조명 시설을 설치하여 밤에도 경기를 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주변에 넓은 휴식 공간을 설치하여 편안하게 경기를 관람하고 쉴 수 있도록 하였다. 전국 체육 대회 이후 동호인뿐만 아니라 시민들에게도 개방하여 생활 체육 활성화는 물론 여가 선용에도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이렇듯 김천시에서는 2000년 5월 제38회 경북 도민 체육 대회 개최 이후 종합운동장에만 의존하던 체육 시설을 전국 체육 대회를 치르는 데 손색이 없도록 2005년 실내 체육관, 2006년 실내 수영장과 인라인롤러경기장, 테니스장 등을 건립했을 뿐만 아니라 종합 운동장 내 전광판, 성화대, 조명탑, 국궁장 증축 공사 등의 개수와 보수에 만전을 기해 전국 최고의 체육 시설이란 호평을 받았다.
[제87회 전국 체육 대회가 열리다]
김천 지역에서는 일제 강점기인 1922년부터 김천체육회 주관으로 전국 규모의 조선 육상 경기 대회를 7회나 개최하였다. 또한 전국 남녀 장사 씨름 대회와 1934년의 남조선 역기 대회를 개최했을 정도로 체육 도시로서의 면모를 일찌감치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광복 이후 체육 시설이 빈약하여 전국 단위 체육 행사는 물론 도 단위 체육 대회도 변변히 개최하지 못하다가 2000년 3만 석 규모의 현대식 종합운동장을 준공하면서 경북 도민 체육 대회와 전국 체육 대회를 유치하기에 이르렀다.
2000년 5월 9일부터 12일까지 펼쳐진 제38회 경북 도민 체육 대회는 김천시 승격 50년 만에 처음으로 개최된 도민 체육 대회로서 화합 체전, 질서 체전, 문화 체전을 표방하며 임원 2,077명, 선수 7,028명 등 총 9,357명이 참가한 역대 최대 규모로 개최되었다. 그리하여 김천시는 농구·궁도·배드민턴·볼링·우슈에서 선전하여 포항시에 이어 종합 2위에 올랐으며, 개회식과 폐회식, 대회 운영, 경기장 시설, 자원 봉사, 부대 행사 등 모든 방면에서 전국 체육 대회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에 김천시와 시민들은 경북 도민 체육 대회를 성공리에 개최한 자신감으로 전국 체육 대회 유치를 위한 준비에 들어갔고, 2001년 5월 15일 ‘2006년 제87회 전국 체육 대회 유치 신청서’를 대한체육회에 제출하면서 전국 체육 대회 유치를 위한 대단원의 막을 올렸다. 그리고 전라남도 목포시와 경기도 수원시 등 쟁쟁한 상대 도시들을 대상으로 한 치열한 유치전에 돌입하여, 2003년 11월 27일 김천시와 시민들의 열정과 노력을 높이 평가받으면서 대한체육회 이사회의 만장일치로 수원시를 누르고 2006년 전국 체육 대회 개최 도시로 선정되었다.
결정에 불복한 경기도가 부천시를 전국 체육 대회 개최지로 재신청하는 과정에서 최종 선정이 보류되기도 했지만, 2004년 2월 개최된 대한체육회 이사회에서, 모든 준비가 완벽하고 시민들의 대회 유치에 대한 염원이 높다는 점을 인정받아 19:8로 개최를 확정지었다. 중소 도시인 김천시의 전국 체육 대회 유치는 인구 100만 명의 수원시와 87만 명의 부천시를 누르고 시민의 열정으로 이룩해 낸 대역사로 평가받을 만한 사건이었다.
이후 김천시는 2004년 3월에 전국체전추진기획단을 출범하고 전국체전홍보대사 위촉과 사상 최대 규모의 전국체전범시민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회는 기관 단체장과 기관 단체, 언론계 인사 등 1만 5000명으로 구성되어 완벽한 대회 운영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기했다. 또 2005년 5월 김천실내종합체육관을 준공한 데 이어 2006년까지 실내수영장과 궁도장, 사격장 등 35만 6513㎡의 부지 면적에 4만 1058㎡ 건축 면적의 종합스포츠타운을 준공하기에 이르렀다.
김천시는 원활한 대회 준비 및 운영을 위해 14부, 33개 팀의 체전운영위원회를 구성하고 3개 팀, 15명의 종합 상황실을 3개월간 운영했다. 또한 전국 체육 대회를 홍보하기 위해 44명의 홍보대사를 위촉하고, 백두 대간 종주 팀을 지원하며, 대통령배 전국 유도 대회 등 7개의 전국 단위 체육 대회를 개최했다. 여기에 3,6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선수촌 아파트를 임대하고, 꽃길 조성, 도시 환경 정비, 프레스 센터 운영, 문화·예술 행사 개최, 선수단 자매결연, 시민 문화 운동 전개, 성화 봉송, 향토 음식점 운영, 재래시장 환경 개선, 특산물 전시·판매장 운영, 경기장 의료 지원 등 성공적인 체전을 위한 대비 태세를 확립했다.
마침내 2006년 10월 17일부터 23일까지 제87회 전국 체육 대회가 41개 종목, 2만 5000명의 임원과 선수가 참가한 가운데 역대 최대 규모로 개최되어 가장 성공적인 체전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제87회 전국 체육 대회는 김천 시민이 함께 준비하고 운영한 화합 체전으로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올린 경제 체전, 쾌적하고 자연 환경과 조화를 이룬 환경 체전, 국민 화합에 기여한 화합 체전으로 기록되었다. 전국 체육 대회의 성공적 개최를 계기로 김천시는 대대적인 스포츠 인프라를 구축하여 최첨단 스포츠 메카 도시로서의 위상을 구축하게 되었다. 또한 깨끗하고 아름다운 도시 환경을 조성하여 역사와 전통의 도시에 부합하는 다양한 문화 축제의 장으로 승화하여 김천이란 도시 이미지를 전국에 각인시켰다는 찬사를 받았다.
[김천이 배출한 스포츠 스타들]
근대 체육이 우리나라에 뿌리 내린 이래 2010년 현재까지 약 100년 동안 김천 지역은 전국적인 체육 명문 도시로서 자리매김하며 위상에 걸맞게 걸출한 스포츠 스타들을 배출하였다. 그 중 한 명이 영남 최고의 육상 중장거리 선수였던 강석윤이다. 김천시 농소면 출신의 강석윤은 어려서 육상에 대한 소질과 기록이 인정되어 대구 대륜중학교로 스카우트된 속칭 3걸(三傑) 선수이다. 삼걸은 3,000m, 5,000m, 1만m 등 세 종목에서 모두 우승한 선수에게 붙여진 명예로운 호칭이다.
강석윤은 1948년 영남체육회에서 개최한 제1회 경북 체육 대회 1만m 종목에서 34분 53초 2로 신기록을 세우며 우승했고, 그 이듬해 5,000m에서 16분 48초로 역시 우승을 했으며, 그 해 가을 전년도에 세운 기록을 16초나 단축하여 우승하는 등 당시 중장거리계를 평정하며 1949년 3걸에 올랐다. 또 대구시보사가 주최한 제1회 대구·경주 간 왕복 역전 경주 대회에 대륜중학교 대표로 출전하여 대구역에서 반야월까지 제1구간 주자로 뛰어 1위를 했고, 제7구간인 건천에서 영천까지도 구간 1위를 하여 대륜중학교가 종합 우승을 하는 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당시 강석윤은 우리나라 최고 육상 선수들인 손기정, 서윤칠, 함기룡, 서윤복, 남승룡 등과 어깨를 겨루며 친선 달리기를 하는 등 김천 지역을 대표하는 육상 선수였다. 강석윤은 김천시 육상연맹 초대 회장과 경북육상연맹 부회장으로 재직했고, 1984년 경상북도 최고 체육상을 수상하였다.
정봉수는 김천시 증산면 출신으로 16세 때 경상북도 단거리 대표로 활약했으며, 육군 체육 특기병으로 선발되어 육군 육상 팀 코치와 3사관학교 육상 감독을 지냈다. 1983년 88올림픽 꿈나무대표팀 감독을 거쳐 1987년 코오롱마라톤 팀 창단 감독에 취임하여 김완기가 2년 연속 한국 신기록을 세우고 1992년 황영조가 2시간 10분벽을 돌파하는 한국 신기록을 세우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 감독으로 황영조의 우승에 견인차 역할을 했다. 이후 코오롱그룹의 평생 이사가 되었고, 한국 마라톤의 산증인으로서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조련술로 선수들을 훈련시켜 한국 마라톤이 40여 년간의 암흑기에서 벗어나 세계 정상으로 재도약할 수 있도록 만들어 국민들에게 희망을 안겨 준 장본인이다.
원로 체육인 김호건은 김천시 아포읍 제석리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 현대 체육이 김천에 보급된 후 올림픽 출전에 남달리 의욕을 불태웠다. 김호건은 서상천 대한역도연맹 회장의 제자 원희득이 김천중학교와 김천고등학교 체육 교사로 부임하여 김천 지역 젊은이들에게 역도를 가르칠 때인 1938년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다. 1945년 11월 서울에서 열린 전국역도대회에서 신기록을 수립했고, 1946년 전국역도선수권대회에서도 1위를 차지해 1948년 제12회 영국 런던올림픽 출전이 확정적이었으나 국가 대표 김창희와의 대결에서 아쉽게 패해 올림픽 출전의 꿈을 접어야 했다. 그 후 후배 양성에 힘을 기울여 1949년 전국신인역도대회에서 권영태 등 많은 선수들이 상위권에 입상하는 데 기여하는 등 김천 체육 발전에 기여했다.
최일랑은 김천시 농소면 월곡리 출신으로 김천 궁도의 선무정과 김산정을 이끈 사두(射頭)로서 전국 대회와 경상북도 대회를 휩쓴 김천 궁도의 선구자였다. 1982년 궁도에 입문하여 1984년 경북협회장기 궁도 대회를 시작으로 제1회 진영단감제 궁도 대회, 제3회 영남 남녀 궁도 대회, 제23회 인천 시민의 날 및 5·19 인천 상륙 기념 궁도 대회, 제14회 금산인삼제 전국 남녀 궁도 대회, 경북 도민 체육 대회 및 전국 체육 대회, 2005년 제7회 통일 염원 전국 남녀 궁도 대회 등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특히 평생에 한 번도 하기 어렵다는 15시(矢), 15중(中)의 성적을 세 차례나 기록해 화제가 되었다. 1995년 선무정에서 9대와 10대 사두(射頭)를 지내고, 김산정에서 11대 사두를 지내며 궁도 협회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김종섭은 김천시 지례면 여배리 출신으로 18세 때 유도에 입문하여 1967년 국가 대표로 태릉선수촌에 들어가 활약했으며, 철도청 유도부에서 근무한 향토 유도인이다. 전국 체육 대회 등에서 유도 및 씨름 종목으로 1970년대 말까지 활약하며 수차례 우승을 차지했다. 성의상업고등학교와 용인유도대학을 졸업하고 김천시 유도회장, 경북체육회 이사, 김천청년회의소 회장을 거쳐 제5대와 제6대 경상북도 의원을 지냈다. 1995년 9월 유도 7단으로 승단했고, 2005년 12월 유도 8단에 올랐다. 경북체육공로상을 수상했다.
김재한은 김천시 아포읍 대신리 출신으로 1970년대 우리나라 축구계에서 전설의 꺽다리 골게터이자 헤딩슛의 달인으로 불렸다. 한국의 국가 대표 팀 선수 중 190㎝로 가장 키가 커서 좌우 측면의 김진국과 차범근이 올려 주는 센터링을 포워드로 중앙에서 받아 방아를 찧듯 골을 만들어 내던 중앙 공격수로 이름을 날렸다. 축구 국가 대표에서 주택은행축구팀 감독과 주택은행 직원, KB신용정보 부사장까지 올랐다.
이진옥은 김천시 대항면 대성리 출신으로 대룡초등학교와 금릉중학교, 김천농공고등학교를 거쳐 경남대학교를 졸업했다. 1997년 김천농공고등학교에 재학할 당시 체육 교사 박영철의 지도로 사이클에 입문한 지 5개월 만에 전국 대회 단체전에서 우승을 했고, 1980년부터 20여 년간 사이클 국가 대표와 산악자전거[MTB] 국가 대표 선수를 지냈다. 1981년 방콕 아시아 선수권 대회를 비롯하여 1982년 뉴델리 아시아경기대회, 1983년 필리핀 아시아선수권 등 100㎞ 단체에서 우승을 거두었고, 1985년 서울 아시아선수권에서는 개인 도로·단체 도로·100㎞ 단체에서 3관왕에 올랐다. 그 외 체코 세계 사이클 선수권 대회, 런던 올림픽과 미국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오스트리아 세계 선수권, 북경 아시아 대회,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 등 국제 대회에 국가 대표 선수로 크게 활약한 자랑스런 체육인이다.
아포읍 대신리 출신인 이억수는 척추 장애 1급 장애우로, 장애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여 김천의 자긍심을 높인 선수이다. 1989년 양궁을 시작하여 2004년까지 양궁 리커브 선수로 활동하고, 2005년부터는 컴파운드 종목 선수로 활약하고 있다. 1990년 영국에서 열린 제39회 국제 척추 장애인 체육 대회에서 개인 종합 1위와 단체 1위, 그 다음해 역시 영국에서 개인 종합 1위를 차지하고, 1992년 제9회 스페인 장애인 올림픽 대회에서 단체 3위를 했다. 1994년에는 북경 FESPIC 게임에서 개인 1위와 단체 종합 1위를 한 후, 1996년 제10회 애틀랜타 장애인 올림픽 대회에서 당당히 개인 1위를 하여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어 1998년 제1회 IPC 월드 챔피언 영국 대회에서 개인 1위, 2000년 제11회 시드니 장애인 올림픽 대회에서 단체 동메달, 2001년 제3회 세계 선수권 체코 대회에서 개인·단체 1위, 뉴질랜드 WWG 대회에서 개인 은메달과 단체 금메달, 2005년 이탈리아에서 열린 제5회 세계 장애인 선수권 대회에서 개인 3위와 단체 1위를 기록했다. 1990년 양궁 전 종목과 단체까지 석권하여 5관왕에 등극한 후 백마장을 수여 받았고, 올림픽 금메달을 딴 해에는 거상장과 체육 포장을 수상했다.
김천시 남면 용전리 출신의 사이클 선수 박세룡은 금오산초등학교를 거쳐 중앙고등학교를 나와 대진건설 소속으로 오랫동안 태극 마크를 달고 향토 김천을 빛냈다. 1982년 뉴델리 아시안 게임 개인 도로 185㎞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것을 필두로 1982년 8·15경축 사이클 개인 종합 금메달을 땄다. 또한 1983년 말레이시아 국제 사이클 대회 개인 부문에서도 금메달을 땄으며, 1984년 제23회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대회에 출전하여 4위를 기록했다. 1986년 『서울신문』·『스포츠서울』·동아생명보험이 공동 주최한 제6회 8·15경축 전국 실업 도로 사이클 선수권 대회 개인전에서 8시간 14분 49초 51로 1위를 하여 일간지에 대서특필되었으며, 사이클 마지막 구간인 충주~서울 간 130.9㎞에서도 역시 1위로 골인했다.
41연승 무패 신화의 레슬러 김인섭은 김천시 지례면 관덕리[활남] 출신으로 중학교 때 유도로 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체중 미달로 고등학교 때 레슬링으로 진로를 바꾸었고, 1998년 국군체육부대[일명 상무]를 제대하고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98년 방콕 아시아 게임과 세계 선수권 대회를 시작으로 그레코로만형 58㎏급에서 41연승 무패를 기록한 한국의 대표적인 레슬링 선수다. 1998년 제13회 아시아경기대회 우승, 1998년·1999년 세계 선수권 대회 우승, 2000년 제27회 호주 시드니 올림픽 대회 2위, 2002년 제14회 아시아 경기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김인섭은 순간적으로 상대를 낚아채는 변형 엉치걸이 기술과 맞잡기 등 기술 레슬링을 구사하는 최고의 선수로 군림했다. 동생 김정섭 역시 아시안게임에서 76㎏급 동메달을 획득한 레슬링 형제로 유명하다.
유도 선수 김재범은 김천시 부곡동 출신으로 16세 때 제28회 춘계 전국 중고 유도 연맹전 단체전 2위를 시작으로 2002년 제73회 YMCA 전국 유도 대회 66㎏급 1위, 제30회 춘계 전국 중고 유도 연맹전 1위, 세계 청소년 선수권 대회 파견 선발전 겸 전국 청소년 유도 선수권 대회와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대회 및 각종 유도 선수권 대회 등에서 각각 1위와 2위를 차지하였다. 또한 2004년 세계 청소년 및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 대회 파견 선발전 겸 전국 청소년 유도 선수권 대회에서 73㎏급 1위, 2005년 아시아 선수권 대회에서 1위를 차지했다. 특히 2005년 한국 유도를 마감하는 제43회 대통령배 전국 유도 대회가 고향인 김천실내체육관에서 열렸는데, 남자 73㎏급 결승에서 2004 아테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며 ‘한판승의 사나이’로 불린 이원희를 2003년 7월 대표 선발전에 이어 다시 한 번 더 누르고 국내 최강의 자리를 굳건하게 지켰다.
박내식은 김천시 조마면 강곡리 출신으로 금오산초등학교 시절부터 높이뛰기 선수로 경북도민체전에 참가하여 두각을 드러냈다. 성의중학교에 재학 중인 1974년 제2회 전국 소년 체육 대회에 참가하여 높이뛰기 부문에서 은메달을 획득했고, 1977년 제58회 전국 체육 대회 금메달, 10종 경기에서 은메달, 제59회 전국 체육 대회 은메달, 제60회 전국 체육 대회 장대높이뛰기 은메달, 제63회 전국 체육 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제10회 아시아 경기 대회와 1988년 서울 올림픽 대회, 2002년 제14회 부산 아시아 경기 대회, 2003년 대구 세계 유니버시아드 경기 대회 등에서는 국제 심판으로 활약했다. 1986년 체육부장관상, 1991년 체육청소년부장관상, 1997년 교육부장관상을 수상했고, 대한육상경기연맹 신인발굴위원회 부위원장, 한국중고육상경기연맹 전무이사를 지냈다.
씨름 선수 이태현은 신장이나 체중 등 신체적 조건이 천하장사 감으로 일찍부터 주목을 받았다. 현대코끼리씨름단에 입단하여 천하장사 3회, 백두장사 17회, 지역 장사 12회, 설날장사와 기타 장사 씨름 대회에서 4회에 걸쳐 등극하는 등 모래판의 황태자로 군림했다. 1995년 첫 MVP 수상 이후 네 번째로 영광을 안은 2003년도에는 영천과 보령, 순천에서 각각 열린 씨름 대회에서 차례로 지역 장사에 등극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이철승은 올림픽 4회 연속 출전의 기록을 가진 탁구 선수로 중앙초등학교와 성의중학교, 성의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산업대학과 경희대학교를 졸업했다. 1991년 3월 국가 대표 선수로 선발되어 제25회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회에서 남자 복식 동메달과 제26회 애틀랜타 올림픽 대회에서 남자 복식 동메달을 획득하고, 제11회 뉴델리 아시아 탁구 선수권 대회와 제12회 히로시마 아시아 경기 대회에서 역시 복식 1위를 차지했다. 1997년 US 오픈 탁구 대회에서도 영예의 2관왕으로 세계 정상에 우뚝 섰다. 2004년 크로아티아 대회 복식에서 1위를 하고 부산 아시아 게임 등에서 금메달 두 개를 따내며 복식 전문 선수로 이름을 날렸다. 우리나라 대표 선수 중 유일하게 바르셀로나 올림픽과 애틀랜타 올림픽, 시드니 올림픽, 아테네 올림픽 등 연속으로 올림픽 무대를 밟은 선수이기도 하다.
최민호는 김천시 모암동 출신으로 모암초등학교 5학년 때 11세의 나이로 유도를 시작했다. 1995년 석천중학교 3학년 때 전국 추계 유도 연맹전 50㎏급에서 1위를 한 후 고등학교에서 55㎏급으로 올려 2학년과 3학년 때 전관왕에 올랐다. 1998년 청소년 국가 대표 선발전에서 1위에 올라 1999년 용인대학교에 입학했고, 이후 60㎏급 국가 대표 선수로 선발되어 2000년부터 각종 국제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2002년 프랑스 파리 오픈 대회에서 1위, 부산 아시안 게임 1위, 2003년 대구 세계 유니버시아드 경기 대회에서 개인전 2위를 획득하였다. 2003년 창원경륜공단 소속으로 일본 오사카 세계 선수권 1위,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대회 3위, 2005년 남녀 체급별 대회 1위, 2007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3위를 기록했으며, 2008년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제29회 올림픽에서 예선부터 결선까지 모두 한판승으로 제압해 ‘한판승의 사나이’란 명성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