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0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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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體育 |
영어음역 | Cheyuk |
영어의미역 | Physical Education |
분야 | 문화·교육/체육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문재원 |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에서 신체를 단련하고 운동 능력을 기르는 일에 관련된 제반 활동.
[개설]
인간의 신체 활동은 역사적으로 볼 때 음식물 획득과 종족 보존 등의 본능에서 출발되었다. 거친 자연환경 속에서 생존을 위한 자연과의 투쟁 과정에서 달리기와 던지기, 때리기 등의 신체 활동이 도구의 개발과 제작, 사용을 통해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교육으로 연결되어 체육이라는 개념으로 정립되었다.
이후 정착 생활을 통해 부족 국가의 형태를 갖추면서 군사력 유지를 위한 무예의 수단으로 체육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고대 농경 사회에서는 농경과 제천 의식이 기본 바탕이 되어 영고, 무천, 동맹 등의 제사 의식으로 이어졌는데 김천 지방에는 삼한 시대의 대표적인 소국인 감문국이 주변국들과의 전쟁과 풍년을 기원하는 나라제사에서 유래되었다는 빗내농악이 대표적인 경우에 속한다.
삼국 시대에는 전쟁이 빈번해지면서 무술과 말 타기, 격구, 씨름, 수영, 수박 등의 무예적인 성격을 띤 활동이 많았다. 신라 하대에는 유희, 오락이 발달하여 투호, 공차기, 바둑, 장기, 윷놀이 등의 사교적이고 오락적인 성향이 발달하고 불교 행사나 명절을 중심으로 연날리기와 줄다리기, 씨름과 같은 민속놀이도 성행했다.
고려 시대에는 초기 강력한 북방 민족과의 대결 국면으로 인해 군사 조직을 중심으로 격구, 씨름, 수박 등의 무예를 중시했는데 나라가 안정되면서 추석, 단오, 설 등의 명절과 연등회, 팔관회 등의 불교 행사와 병행하여 조직적이고 단체화된 형태의 경기 방식이 출현하게 되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김산[김천] 풍속에 단옷날 사람들이 직지사에 모여 씨름을 하는데 원근 사람들이 모두 모여 승부를 겨루고 소문을 듣고 구경나온 사람이 수천 명이나 되며 이것은 상례가 되어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김천 지방 체육의 역사가 기록된 최초의 기록이다.
또 전투에서 기마술이 중요시되면서 말을 타고 공을 이동시키는 격구가 단체 경기로서 군대를 중심으로 성행했고 민간에서는 도보격구 형태로 변형되어 얼레공놀이라는 이름으로 발달하였다. 오늘날의 하키와 비슷한 경기 방식이었다. 김천 지방에서도 근년에까지 장치기라는 이름의 민속놀이가 농촌을 중심으로 널리 행해졌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조선 시대에는 임진왜란 전후로 체육 형태에 큰 변화가 나타났는데 초기에는 수박이 개인 무예로서 중시되어 무과 시험 과목으로까지 지정되고 격구, 격봉, 쌍육, 투호 등이 사대부의 학문과 정신 수양의 보조 수단으로서 체계화되었다. 서민 사회에서도 다양하고 보다 세련된 형태의 개인 및 단체 놀이가 성행했는데 죽마, 줄넘기, 팽이치기, 연날리기, 제기차기, 자치기, 널뛰기, 그네뛰기, 공기놀이, 강강술래, 매사냥 등 형태가 점차 다양해졌다.
김천 지방에서도 개령면 동부리와 아포읍 대신리 주민간의 줄다리기, 봉산면 신리와 예지리 및 대항면 대룡리 주민 간의 줄다리기 행사가 조선 시대 때부터 전래되었고 특히 김천씨름대회는 김천장의 번성과 함께 조선 시대 말부터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근대 체육의 전개]
우리나라에서는 통상 1895년 갑오경장을 중심으로 근현대 체육의 기준으로 삼는다. 갑오경장 이후에 사회 전반에 걸쳐 근대적인 개혁이 일어났는데 과거 제도와 신분 제도의 혁파로 교육의 균등이 이루어지고 교육령의 반포에 의해 전국에 학교가 세워졌다. 고종은 1895년 교육입국조서를 통해 체육의 근대화를 가속화시켰다.
김천 지방에는 1907년 지례군수 김황진이 일중소학교를 세웠고 항일 투사 여중룡이 김천양성학교를 세웠으며 1910년에만 16개교가 설립되었다. 각 학교에서는 체육을 필수 과목으로 넣고 운동회를 개최하였으며 점차 학교 대항전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빈번한 체육 활동은 지역민의 단합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민간 체육 단체의 조직화를 가속화 시켰다.
1906년 대한체육구락부를 시작으로 대한국민체육회, 광학구락부, 무도기계체육부, 체조연구회, 성계구락부 등 다양한 체육 단체가 창립되었고 1909년에는 전국 학교 연합 운동회까지 계획되었다. 그러나 일제가 이 같은 체육 활동의 조직화가 민족 항일 운동으로 이어지는 것을 경계하여 1909년 12월 27일자로 전국의 모든 체육 활동을 폐지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러다 1920년 7월 13일 조선체육회가 창립되고 전국 각 시도에 산하 체육협회가 생겼으며 같은 해 11월에 제1회 조선 야구 대회가 열리면서 우리나라 체육의 조직화, 체계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 시기 김천에서는 종교 단체의 선교 사업의 일환으로 학교 체육이 전개되었는데 1921년 10월 31일 김천공립보통학교와 금릉청년회 주최로 가을 운동회가 성대하게 열렸고 1922년 조직된 김천체육회가 조선 육상 경기 대회를 7회까지 열었다. 1923년에는 김천고등보통학교에서 대운동회를 열었고 1934년에는 남조선 역기 대회가 열렸다. 1936년 5월 29일 김천체육협회가 창립되어 학교 운동회 중심의 체육이 사회 및 일반 체육으로 확산·체계화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1946년 6월 5일 김호건, 백태진 등이 주동이 되어 김천군 내의 군소 체육 단체를 통괄하는 김천 체육회 결성 대회를 열었다. 1949년 김천시 체육회는 각 부를 연맹제로 개편하고 경상북도 체육회 산하에 가입했다. 1963년부터 경북 도민 체육 대회를 시작되면서 김천 체육이 크게 알려졌는데 1964년에 재개된 전국 남녀 씨름 장사 대회는 김천을 씨름의 고장으로 알리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로부터 김천시 체육회 주관으로 매년 시민 체육 대회가 열렸으며 마침내 1978년 김천 체육의 산실인 공설 운동장이 삼락동에 준공되었다.
1995년 시·군 통합 후 현대적인 종합 운동장 건립을 시정의 역점으로 정하고 전국 규모의 체육 행사 유치를 목표로 행정력을 집중한 결과 1996년 종합 운동장 건립 공사를 착공하게 되었다. 4년여의 공사 기간을 거쳐 국제 공인 규모로 3만 명을 수용하는 김천종합운동장을 2004년 4월 준공하여 제38회 도민 체육 대회를 성공리에 개최하였다. 중소 규모의 도시에서 전국 최초로 전국 체육 대회를 유치하여 2006년 제87회 전국 체육 대회을 역대 가장 성공적인 대회로 치러냈다.
[체육 기반 시설]
김천의 체육은 김천시 체육회와 김천시 생활체육회, 김천시청 체육 관련 부서, 경상북도 김천교육지원청 체육 관련 부서 등을 중심으로 이끌어져 왔다. 1995년 지방 자치 시대를 맞아 민선 시장이 중심이 된 김천시의 행정은 시 승격 50년이 넘도록 도민체전도 개최하지 못한 김천 체육의 현실을 직시하고 먼저 체육 기반 시설 확충과 전국 및 도 단위 대회 유치에 행정력과 체육 단체의 역량을 집중했다.
우선 열악한 종합 운동장을 대신할 초현대식 종합 운동장 건립을 위해 중앙 정부와 경상북도, 각급 기관을 상대로 노력 끝에 3만 명을 수용 가능한 국제 공인 수준의 현대식 종합 운동장을 2000년 4월 준공하기에 이르렀다. 김천 체육의 메카로 자리 잡은 삼락동 김천종합스포츠타운은 1996년부터 2006년까지 김천종합운동장과 보조 경기장, 실내 체육관, 실내 수영장, 사격장, 국궁장, 인라인롤러장, 테니스장 등 삼락동 일대 35만 6513㎡의 부지 면적에 4만 1058㎡의 건축 면적을 보유한 전국 최대 규모의 종합 스포츠 단지로 조성되었다.
중심이 되는 종합 운동장은 김천시 삼락동 488-1번지에 부지 면적 20만 7699㎡,연면적 1만 5000㎡로 1996년 12월부터 2000년 4월 15일까지 3년여의 공사 끝에 수용 인원 최대 3만 명 규모로 완공되었다. 주경기장은 3만 6300㎡로 400m 트랙 8라인, 보조 경기장은 140m 길이의 6라인이 설치되었다.
또 김천실내체육관은 2005년 5월 6일 김천시민들의 오랜 숙원이었다. 2006년 전국 체육 대회의 농구와 배드민턴 경기장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총사업비 380억 원을 투입하여 2001년 12월 기공식을 가진 후 3년 6개월 간의 공사 끝에 준공되었다. 부지 면적 4만 3020㎡에 연면적 1만 5636㎡, 지상 3층·지하 1층 규모로 최대 8000여 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국제 공인 규격 주경기장과 연면적 2,351㎡에 500석의 관중석이 완비된 보조 경기장으로 구성된 초현대식 다목적 체육관이다.
그동안 시 관내에 변변한 실내 체육관이 없어 각종 실내 스포츠 경기 관람 기회가 전무했고 시민의 생활 체육 공간도 많이 부족하였으나 국제 공인 경기장 규모의 실내 체육관 건립으로 농구, 배구, 핸드볼, 체조, 씨름 등 각종 실내 체육 행사는 물론 국내외 수준 높은 선수들이 출전하는 주요 국내외 경기를 유치할 수 있어 수준 높은 경기를 관람할 수 있게 되었다. 주요 시설로는 주경기장, 보조 경기장, 생활체육실, 관리실, 전기실, 방송실, 조명실, 매점 등이며 개최가 가능한 경기 종목으로는 농구, 배구, 배드민턴, 탁구, 핸드볼, 체조 등이다.
이중 김천실내수영장은 330억 원의 예산으로 2004년 11월부터 2006년 5월까지의 공사 끝에 면적 1만 2578㎡, 지하1층·지상3층, 1,500석의 관중석을 갖추었다. 경기 종목 중 수영, 다이빙, 수구, 수중 발레 등 4개 종목의 경기가 치러졌으며 자연 채광 및 환기 시스템을 도입한 자연 친화적이고 에너지 절약형의 쾌적한 경기장으로 경기력 형상에 큰 도움이 되었으며, 현재 시민에게 개방되어 누구나 저렴한 비용으로 수영 등 각종 생활 체육 시설로 편리하게 이용하고 있다. 실내 수영장에는 경영풀 50m 10레인, 다이빙장 등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그리고 인라인 롤러경기장은 2005년 10월부터 2006년 9월까지의 공사 끝에 49억 원의 예산으로 2만 8250㎡의 부지에 건축 연면적 2,000㎡, 경기장 5,000㎡, 관중석 500석 규모이며 부대시설로는 샤워장, 탈의실, 화장실 각 1동이 있다. 테니스장은 2005년 10월부터 2006년 9월까지 73억 원의 예산으로 제87회 전국 체육 대회 개최를 대비하여 기존의 협소하고 노후된 테니스장을 철거하고 현대식 최신 시설로 건립하였다. 부지 면적 3만 5540㎡, 경기장 면적 1만 5000㎡, 케미칼 20면, 관중석 1,386석 규모로 단일 코트로서는 전국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또 전 코트에 야간 조명 시설을 설치하여 야간에도 경기를 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충분한 관람석을 설치하였고 주변 조경을 갖추고 넓은 휴식 공간을 설치하여 편안하게 경기를 관람하고 쉴 수 있도록 하였다. 전국체전 동안 테니스 경기가 치러졌으며, 체전 이후에는 동호인뿐만 아니라 시민들에게 개방하여 생활 체육 활성화는 물론 여가 선용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2000년 5월 제38회 경북 도민 체육 대회 개최 이후 종합 운동장 단일 경기장에 의존하던 체육 시설을 전국체전을 치르는데 손색이 없도록 2005년 체육관, 2006년 실내 수영장, 인라인롤러경기장, 테니스장 등의 건립뿐만 아니라 종합 운동장 내 전광판, 성화대, 조명탑, 국궁장 증축 공사 등 개·보수에 만전을 기하여 전국체전 이래 최고의 시설이란 호평을 받고 있다. 2006년 9월 종합 운동장에 조명타워 4기를 16억 원을 들여 건립함으로써 종합 운동장에서 야간 축구 경기 및 각종 행사가 가능하게 되었으며 10월에는 1500만 원을 들여 전광판을 전면적으로 교체하여 관중들의 기록 확인 등에 이해를 돕도록 했다.
[체육 대회]
김천은 일제 강점기인 1922년부터 김천체육회 주관으로 전국 규모의 조선 육상 경기 대회를 7회에 걸쳐 개최했고 1964년부터 전국 남녀 장사 씨름 대회를 개최했을 정도로 체육 도시로서의 면모를 일찌감치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체육 시설 기반이 빈약하여 전국 또는 도 단위 체육대회를 개최하지 못하는 실정이었으나 2000년 종합 운동장 준공을 계기로 전국적인 규모의 체육 대회를 적극적으로 유치하며 김천 체육의 위상을 높일 수 있게 되었다.
2000년 5월 9일부터 12일까지 펼쳐진 제38회 경북 도민 체육 대회는 새천년을 맞이하는 첫해에 개최된 도민 체육 대회로서 화합 체전, 질서 체전, 문화 체전을 표방하며 역대 가장 성공적으로 개최된 체전으로 기록되었다. 역대 최고인 임원 2077명, 선수 7028명 등 총 9357명이 참가했으며 농구, 궁도, 배드민턴, 볼링, 우슈에서 1위를 한 김천시가 포항에 이어 종합 2위에 올랐다.
김천시는 도민 체육 대회의 성공적 개최를 자신감으로 삼아 2001년 5월 제87회 전국 체육 대회 유치 신청서를 제출하면서 전국 체육 대회 유치를 위한 대단원의 막을 올렸다. 오랜 준비와 역경을 이겨내고 마침내 2004년 2월 4일 김천 유치가 확정되었다. 중소도시인 김천의 전국 체육 대회 유치는 인구 100만 명의 수원시와 87만 명의 부천시를 누르고 시민의 열정으로 이룩해낸 대역사로 평가받을 만한 사건이었다.
이후 김천시는 2004년 3월 전국체전추진기획단을 출범하고 2005년 전국체전홍보대사 위촉, 전국체전범시민추진위원 위촉 등 역사적인 체전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이어 2006년 10월 17일부터 23일까지 제87회 전국체전을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41개 종목 2만 5000명의 임원과 선수가 참가한 가운데 역대 가장 우수한 시설과 운영 속에 성공적으로 개최된 체천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김천의 체육인]
근대 체육이 우리나라에 뿌리 내린 이래 2010년 현재까지 약 100년 동안 김천 지역은 전국적인 체육 명문 도시로서 자리매김하며 위상에 걸맞게 걸출한 스포츠 스타들을 배출하였다. 영남 최고의 육상 중장거리 선수였던 강석윤이 대표적이다. 정봉수는 김천시 증산면 출신으로 16세 때 경상북도 단거리 대표로 활약했으며, 육군 체육 특기병으로 선발되어 육군 육상 팀 코치와 3사관학교 육상 감독을 지냈다. 1983년 88올림픽 꿈나무대표팀 감독을 거쳐 1987년 코오롱마라톤 팀 창단 감독에 취임하여 김완기가 2년 연속 한국 신기록을 세우고 1992년 황영조가 2시간 10분벽을 돌파하는 한국 신기록을 세우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원로 체육인 역도 선수 김호건은 김천시 아포읍 제석리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 현대 체육이 김천에 보급된 후 올림픽 출전에 남달리 의욕을 불태웠다. 김호건은 서상천 대한역도연맹 회장의 제자 원희득이 김천중학교와 김천고등학교 체육 교사로 부임하여 김천 지역 젊은이들에게 역도를 가르칠 때인 1938년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다. 최일랑은 김천시 농소면 월곡리 출신으로 김천 궁도의 선무정과 김산정을 이끈 사두(射頭)로서 전국 대회와 경상북도 대회를 휩쓴 김천 궁도의 선구자였다. 김종섭은 김천시 지례면 여배리 출신으로 18세 때 유도에 입문하여 1967년 국가 대표로 태릉선수촌에 들어가 활약했으며, 철도청 유도부에서 근무한 향토 유도인이다. 김재한은 김천시 아포읍 대신리 출신으로 1970년대 우리나라 축구계에서 전설의 꺽다리 골게터이자 헤딩슛의 달인으로 불렸다. 사이클 선수 이진옥은 김천시 대항면 대성리 출신으로 1980년부터 20여 년간 사이클 국가 대표와 산악자전거[MTB] 국가 대표 선수를 지냈다. 아포읍 대신리 출신 양궁 선수 이억수는 척추 장애 1급 장애우로, 장애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여 김천의 자긍심을 높인 선수이다. 김천시 남면 용전리 출신의 사이클 선수 박세룡은 금오산초등학교를 거쳐 중앙고등학교를 나와 대진건설 소속으로 오랫동안 태극 마크를 달고 향토 김천을 빛냈다. 41연승 무패 신화의 레슬러 김인섭은 김천시 지례면 관덕리[활남] 출신으로 순간적으로 상대를 낚아채는 변형 엉치걸이 기술과 맞잡기 등 기술 레슬링을 구사하는 최고의 선수로 군림했다. 동생 김정섭 역시 아시안게임에서 76㎏급 동메달을 획득한 레슬링 형제로 유명하다.
유도 선수 김재범은 김천시 부곡동 출신이며, 박내식은 김천시 조마면 강곡리 출신으로 금오산초등학교 시절부터 높이뛰기 선수로 경북도민체전에 참가하여 두각을 드러냈다. 씨름 선수 이태현은 신장이나 체중 등 신체적 조건이 천하장사 감으로 일찍부터 주목을 받았다. 현대코끼리씨름단에 입단하여 천하장사 3회, 백두장사 17회, 지역 장사 12회, 설날장사와 기타 장사 씨름 대회에서 4회에 걸쳐 등극하는 등 모래판의 황태자로 군림했다. 이철승은 올림픽 4회 연속 출전의 기록을 가진 탁구 선수로 중앙초등학교와 성의중학교, 성의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산업대학과 경희대학교를 졸업했다. 최민호는 김천시 모암동 출신으로 모암초등학교 5학년 때 11세의 나이로 유도를 시작했다. 2008년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제29회 올림픽에서 예선부터 결선까지 모두 한판승으로 제압해 ‘한판승의 사나이’란 명성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