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0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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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人文地理 |
영어음역 | Inmun Jiri |
영어의미역 | Human Geography |
분야 | 지리/인문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철우 |
[정의]
경상북도 김천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인문지리적 요소.
[개설]
김천시는 경상북도 남서부 지역의 사회·문화·산업·행정·교통·관광의 중심지이다. 1995년 생활권이 하나였던 김천시와 금릉군이 하나의 통합시를 이루어 김천시가 되었으며 2010년 현재 1개 읍[아포읍], 14개 면[농소면·남면·개령면·어모면·봉산면·대항면·감천면·감문면·조마면·구성면·지례면·부항면·대덕면·증산면], 6개 동[자산동·평화남산동·양금동·대신동·대곡동·지좌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김천시는 고려 시대부터 충청도에서 추풍령을 넘어 경상도로 통하는 김천역이 설치되어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던 곳이며, 조선 후기에서 일제 강점기 초기에는 김천장이 대구 다음으로 큰 시장을 형성하여 활기를 띠었던 곳이다. 1905년 경부선, 1931년 경북선, 1918년 경부국도, 1970년 경부고속도로가 통과함으로써 더욱 교통의 요충지가 되었다.
김천시의 경위도상 위치는 동경 127°52′~128°18′, 북위 35°49′~36°15′이다. 동쪽으로 경상북도 성주군, 서쪽으로 충청북도 영동군과 전라북도 무주군, 남쪽으로 경상남도 거창군, 북쪽으로 경상북도 상주시·구미시와 접한다. 동쪽에는 금오산(金烏山)[977m]이 솟아 있고, 서쪽에는 황악산(黃岳山)[1111m] 또는 황학산(黃鶴山)이 추풍령과 이어져 충청북도와 경계를 이루며, 남서 방향으로 소백산맥의 일맥이 험준한 산악 지대를 이룬다. 특히 삼도봉(三道峰)[1176m]은 충청북도·전라북도·경상북도의 3도 경계점이다.
대덕산(大德山)[1290m]에 이어지는 험준한 산지가 전라북도와 경계를 이루고 국사봉·수도산·단지봉에 이어지는 산지가 경상남도와 경계를 이룬다. 남동부에서는 성주군과의 경계에 형제봉(兄弟峰)[1022m]·염속산·백마산·염암산이 이어져 금오산에 이르고, 북으로는 광덕산·백운산·국수봉 등이 구릉 지대를 이루며, 추풍령·면목령·주치령·우두령 등의 고개는 주요 교통로가 된다.
[역사]
1. 고대
김천시 일대의 선사 시대의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는 유물·유적은 그리 많지 않다. 다만 구성면 송죽리에서 신석기 시대 유적이 발견되었고 감문면 송북리, 구성면 상거리 등지에서 고인돌과 마제석촉 등 청동기 시대의 유물·유적이 발견됨으로써 늦어도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문화 단계에서 김천 지역에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했음을 알려 준다.
김천 지역에서는 삼한 시대 무렵 소국(小國) 단계로 진입했는데 감문국(甘文國)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감문국은 231년(조분이사금 2) 신라의 영토로 편입되었으며 557년(진흥왕 18) 감문주(甘文州)를 두어 상주(上州)의 치소가 되었다. 이 일대는 신라·백제의 접경 지역으로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는데, 이 주치(州治)의 설치는 백제와의 전쟁에 대비한 군사적 필요성에 따른 조처였다.
614년(진평왕 36) 상주의 주치가 일선주(一善州)[善州]로 옮겨진 뒤 군현 체제가 성립되면서 금물현(今勿縣)[지금의 김천]·김산현(金山縣)[지금의 김천]·지품천현(知品川縣)[지금의 지례면]·무산현(茂山縣)[지금의 전라북도 무주군] 등을 거느리게 되었다. 757년(경덕왕 16) 지방 제도 개편 시 감문군은 개령군(開寧郡), 금물현은 어모현(禦侮縣), 지품천현은 지례현(知禮縣), 무산현은 무풍현으로 각각 개명되었다. 김천 지역은 선산과 더불어 신라 불교 전래의 한 통로로서 일찍이 눌지왕 대에 아도(阿道)가 직지사(直指寺)를 창건하였다.
2. 고려 시대
후삼국 통일 이후 고려 시대 때 김천 지역은 영속 관계에 변화가 일어나 개령군의 속현이던 무풍현이 지례현(知禮縣)의 속읍이 되었고, 김산(金山)·지례 두 현은 경산부(京山府)[星州]의 속읍으로 편입되었다. 이후 현종 때의 전국적인 지방 제도 개편 당시에 다시 전면 조정되어 1018년(현종 9) 개령군과 어모현이 상주목에 내속되었다.
이러한 영속 관계의 변화는 김천 지역의 정치적·군사적 비중이 크게 약화되었음을 의미하지만, 교통 중심지로서의 기능은 여전히 남아 있어서 김산현에 김천역(金泉驛)이 설치되었다. 1172년(명종 2) 개령군에 감무(監務)가 파견되었고, 1390년(공양왕 2) 지례현과 김산현에도 감무가 파견되면서 다시 행정 단위로서의 중요성을 인정받기 시작하였다.
3. 조선 시대
조선 건국 이후 김산현 관내에 정종(定宗)의 태가 묻혔다고 해서 김산군으로 승격되면서 어모현을 통합하였다. 1413년(태종 13) 개령군은 개령현으로 강등되어 현감이 파견되고, 지례현에도 현감이 파견되었다. 조선 초기 농업의 발달 과정에서 김천 지역 역시 토지가 비옥해 농업 생산력이 급격히 증가했으며, 여러 개의 제언(堤堰)이 축조되는 등 물산이 풍부한 곳으로 지목되었다. 이러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문풍도 성행해 김산향교·개령향교·지례향교 등의 향교가 세워졌으며, 사림파 등장 이후 경렴서원(景濂書院)·경양서원(鏡陽書院) 등의 원사가 건립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정경세(鄭經世)·권경호(權景虎) 등이 의병을 모집하자 개령·김산 등지의 사족(士族)들도 대거 호응해 왜적을 무찔렀다. 조선 후기의 세도 정치가 전개되면서 봉건 체제의 모순이 노출되고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하자, 1862년(철종 13) 김규진(金奎鎭) 등의 주도하에 개령민란이 일어나 민중의 반봉 투쟁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4. 근대
1895년(고종 32) 지방 제도 개혁에서 김산군·개령현·지례현은 모두 군으로 되었고, 1905년 증산면이 성주군에서 지례군으로, 다음 해에 성주군 신곡면(薪谷面)과 황간군(黃澗郡) 남면이 김산군으로 각각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개령군·김산군·지례군이 김천군으로 통폐합되었고, 1931년 김천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07년 이후 허위(許蔿)의 의병 부대는 김천·지례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했으며, 1919년 3·1운동 때 김천면에서는 3월 24일과 4월 5일에, 개령면에서는 3월 24일부터 4월 6일까지 만세 시위 운동이 전개되었다. 또한 유림들의 파리 장서 사건(巴里長書事件)에는 김천 출신 이석균(李鉐均)·이경균(李璟均)·이명균(李明均) 등이 가담하였다. 그리고 1929년 김천소년회·김천청년회는 만주 동포에 대한 탄압 문제를 거론하면서 배일·배중국운동(排日排中國運動)을 추진하였다.
[행정 구역]
김천시는 조선 시대 김산군(金山郡)의 김천면·군내면·미곡면 일대가 시로 발전한 곳이다. 김산군은 신라 때 동잠현(桐岑縣)으로 이곳은 눌지왕 대에 아도(阿道)가 직지사를 창건하는 등 신라 불교 전래의 통로가 되었던 곳이다. 757년에 김산현(金山縣)으로 고쳐 개령군 영현이 되었다. 1018년에는 경산부(京山府)[지금의 성주]의 속현이 되었으나 1390년(공양왕 2) 감무를 둠으로써 독립되었다.
조선에 들어 성주의 속현이었던 어모현(禦侮縣)[지금의 김천시 어모면 일대]을 병합했다. 제2대 임금인 정종(定宗)의 태(胎)를 안치했다 하여 군으로 승격되어 조선 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별호는 금릉(金陵)이었다. 김산군은 1895년 지방 제도 개편으로 3등 군이 되어 대구부 관할이 되었다가, 1896년 13도제 실시로 경상북도에 속했다. 1914년 군·면 폐합에 의해 김산군·지례군·개령군을 통합하여 김천군으로 이름을 바꾸고 20개 면으로 조정했다.
이때 김산군의 군내면과 미곡면이 금릉면으로 통합되고, 김천면은 그대로 존속했다. 예천과 안동을 연결하는 경북선이 부설되던 해인 1931년에 김천면과 금릉면을 합하여 김천읍으로 승격시켰고, 1949년 김천읍은 대구에 이어 경상북도에서 2번째로 시가 되었다. 이때 김천군의 나머지 지역이 금릉군으로 개칭되었다. 1950년 6·25전쟁 이후에는 지리산 지역에 잔존해 있던 공비들의 습격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 1960년 금릉군 부항면에 유촌출장소가 설치되었으며, 1973년 봉산면 복전동이 대항면에 편입되었다.
1983년에는 금릉군 농소면 덕곡동, 개령면 대광동, 어모면 응명동, 감천면 양천동이 김천시로 편입되었으며, 감문면 봉남동·소재동이 선산군 선산읍으로 편입되었다. 1995년 1월 1일 도농 통합에 따라 김천시와 금릉군이 새로운 김천시가 되었으며 3월 1일 아포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98년 김천시 13개 동을 9개 동으로 통폐합[1읍·14면·9동]하고 이후 9개 동을 8개 동으로 통폐합[1읍·14면·8동]하였다. 2000년에 성내동과 남산동을 성남동으로 통합[1읍·14면·7동]하였다. 2008년 용암동과 성남동[성내동]을 자산동으로, 평화동과 성남동[남산동]을 평화남산동으로 통합하여 1읍·14면·6동이 되었다.
[인구]
산업과 경제가 발달함과 도시화로 인한 이촌향도 및 수도권으로의 인구 집중으로 김천의 인구는 점차 감소 추세를 보이며, 2009년 말 김천의 인구는 13만 7796명[외국인 포함]으로 나타났다. 이는 1989년의 인구 15만 8515명보다 13.1%나 감소하였으며 1989년 이후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는 추세이다.
세대수에 있어서는 1989년 3.9명에서 1.3명이 감소하였으며, 인구 밀도는 157.6명에서 2009년 136.6명으로 21명이 감소하였다. 세대수에 있어서만 핵가족화의 영향으로 1989년 4만 1728세대에서 2009년 5만 3122세대로 증가하였다. 65세 이상의 고령자 인구에 있어서는 1996년의 1만 5430명에서 2009년에는 2만 4264명으로 57%가 증가하였다.
[교통]
김천시는 경상도·충청도·전라도를 잇는 교통의 요지이다. 경부선과 경북선이 김천에서 분기하며, 경부고속도로가 동서로 관통해 달리고 있다. 또한 남북으로 상주와 창원을 연결하는 국도, 동서로 영동과 왜관을 연결하는 국도, 남쪽으로 무주와 성주를 연결하는 국도가 통과한다. 지방도는 김천~가산, 김천~안계, 김천~거창, 김천~금수, 김천~마성, 지례~용산 등으로 연결되어 있다.
2010년 12월 31일 현재 김천시를 통과하는 고속 도로는 왕복 8차선의 경부고속국도[고속국도 1호선] 32.3㎞와 왕복 4차선의 중부내륙고속도로 5.2㎞로서 두 노선의 총연장은 37.5㎞이다. 2010년 12월 31일 현재 김천 지역의 국도는 국도 3호선 54.4㎞, 국도 4호선 36.1㎞, 국도 30호선 21.1㎞, 국도 59호선 34.3㎞ 등 총연장 145.9㎞이며, 도로 포장률은 100%이다. 지방도는 2010년 말 현재 9개 노선에 총연장 161㎞로, 도로 포장률은 100%이며 주로 편도 2차선 도로이다. 시군도는 23개 노선에 총연장 219.7㎞이며, 농어촌도로는 210개 노선에 550㎞로 도로 포장이 완료되어 가는 추세이다.
고려 시대부터 충청도에서 추풍령을 넘어 경상도로 통하는 김천역이 설치되어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던 곳이며, 조선 후기에서 일제 강점기 초기에는 김천장이 대구 다음으로 큰 시장을 형성하여 활기를 띠었던 곳이다. 1905년 경부선, 1931년 경북선, 1970년 경부고속도로가 통과함으로써 더욱 교통의 요충지가 되었다.
2010년 12월 31일 현재 김천시의 도로는 고속 국도, 일반 국도, 지방도, 시군도, 농어촌도를 합하여 총연장 1,115㎞에 달한다.
[산업]
김천시의 산업 구조는 1, 2차 산업보다 3차 산업의 비율이 월등히 높은 전형적인 소비 도시를 형성하고 있다. 전체 인구의 35% 정도가 농업에 종사하는데, 주요 농업 지대는 개령평야와 금릉평야로서 김천시의 곡창 지대를 이룬다. 주요 농산물은 쌀, 보리, 콩 등이나 해마다 생산량이 감소하는 반면에 무, 배추, 양배추, 파, 양파, 방울토마토, 참외, 수박, 포도 등 채소류와 과일류는 증가하고 있다.
특히 포도의 경우 2003년도 생산량이 4만 8239톤으로 전국 총 생산량의 13%를 차지하였으며, 김천시 농업 소득의 23%를 차지하는 주요 고소득 작물이다. 약용 작물은 서부와 남서부 산악 지역에서 지황, 적작약, 당귀, 천궁, 시호 등이 재배된다. 인삼은 아포읍, 대덕면, 감문면, 지례면, 조자면 등에서 재배되고, 잎담배는 남서부 지역에서 배재된다. 송이버섯은 남부 산악 지대에서 각각 생산된다. 공업은 김천 1·2차 산업단지와 감문농공단지, 지례농공단지, 아포농공단지, 대광농공단지 등 4개 농공단지에 시설이 밀집되어 있다.
[관광]
김천시 서쪽에 소백산맥과 남쪽에 가야산맥의 수려한 산들을 끼고 있어 산악·사찰관광지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김천시는 경부선과 경북선의 분기점이며 경부고속도로가 통과하고 국도가 여섯 방향으로 뻗어 있는 교통의 요충지로, 서부 산악 지대를 제외하면 교통이 편리해 관광객 유치에 유리한 위치에 있다.
특히 418년(눌지왕 2) 아도화상이 창건한 직지사는 도심과 가까운 대항면 운수리의 천년노송과 옥류가 흐르는 황악산 중턱에 위치한 대사찰로, 1971년에 지정 관광지가 되었다. 경내의 천불전에는 고려 시대 경장대사가 경주 옥돌로 조각한 천불상이 봉안되어 있고, 사명각에는 직지사에서 머리를 깎고 속세를 등진 사명대사의 영정이 있다.
문경 도천사지 동·서 삼층석탑·문경 도천사지 삼층석탑·김천 직지사 석조약사여래좌상·「직지사 대웅전 삼존불탱화」 등의 보물과 일주문·부도군·당간지주 등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직지사 산내 암자로는 화장암·운수암·백련암·은선암 등이 있으며, 최근 개관한 성보박물관에는 직지사 관할 말사에서 거두어들인 불교 문화재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경치가 좋은 내원사계곡과 운수계곡이 있다. 직지사 주위에도 비로봉, 우거진 노송, 신선대의 학떼 등 명소가 많아 연중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증산면 수도산에는 도선대사가 창건한 청암사가 있는데, 경상북도에서 불교 강원으로 손꼽히는 승가대학이 들어서 있다. 청암사 경내에는 인현왕후가 복위를 기원하며 한 많은 세월을 보냈던 극락전, 청암사를 대표하는 42수관음상이 모셔져 있는 보광전, 인도식 불상이 모셔져 있는 대웅전이 있고, 이 외에도 석탑과 범종·큰북 등의 문화재들이 있다.
산내 암자로는 백련암·수도암이 있다. 청암사로 들어가는 ‘불령동천(佛靈洞天)’이라 부르는 계곡 주위에는 유난히 바위가 많다. 또한 수도산 일대를 굽이치며 흘러내리는 수도계곡에는 누워 있는 용의 형상을 한 와룡암과, 용이 살다가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깃들인 용소폭포가 있다. 주민들은 가뭄이 들 때마다 용소폭포 아래에서 기우제를 지낸다.
이 외에도 옥구슬같이 물방울이 바위 위를 흘러내리는 옥류대, 흐르는 물살에 온갖 번뇌를 씻어 보낸다는 수선대 등이 절경을 이룬다. 수도산 산정에는 신라 말경에 도선 국사가 창건한 수도암이 있으며, 수도암 대적광전에는 통일 신라 시대에 조성한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삼층석탑·약광전석불좌상과 수도암터를 가리키는 석물인 돌실패 등의 보물이 있다.
수도산에는 거자나무가 자생하며 매년 곡우절이 되면 위장병과 신경통에 특효를 보이는 곡우물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다. 그 밖에 모암동 국도변에 있는 자산(紫山)의 사모암과 교동의 봉황대, 황금동의 개운사·관음사·신흥사, 남산동의 남산공원과 과하주천, 개령면 동부리 개령향교 뒤편에 자리 잡은 계림사 주변도 경치가 아름다워 소풍지로 이용되고 있다.
그리고 황악산 남쪽의 고성산록에 있는 벚꽃 화원인 고성산송정(高城山松亭)은 오래 전부터 소나무가 우거지고 진달래가 많이 피는 명승지이다. 또한 남면 오봉리의 석가여래좌상, 구성면 송죽리 일대의 구성유원지, 조마면 신곡리의 백화동, 봉산면 북단의 추풍령휴게소 등도 휴양 관광지이다.
유교 문화재로는 교동의 김산향교와 부곡동의 원계서원이 있으며, 다수동과 교동에 각각 미곡정사(微谷精舍)와 봉황대(鳳凰臺)가 있다. 징 제작 보유자인 김일웅(金一雄)이 김천정장(金泉鉦匠)[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9호]으로, 과하주 제조 보유자인 송재성(宋在星)이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었으며, 1991년에는 붓 제작 보유자인 이팔개(李八箇)가 모필장(毛筆匠)[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17호]으로 지정되었다. 그밖에 이명균순국기념비, 여중룡순충기념비 등이 있다.
[민속]
1. 민속놀이
김천시의 대표적인 민속놀이로는 농악과 줄다리기가 있다. 김천시 개령면 광천리 빗내마을에서 전래되어 온 농악은 전쟁에서 유래한 경상도 특유의 진(陣)굿 농악으로 12가락의 굿판이 명확한 차이를 가지면서 마치[잔가락]의 종류도 다양하게 전개된다.
음력 1월 6일에 행해지며, 인원 제한 없이 노소를 불문하고 놀이에 가담하나 보통 한 가구당 한 명씩 참가해 놀이가 구성된다. 진행 방식은 행진 가락인 질굿을 치면 농악이 시작되어 상쇠의 입장을 알리는 문굿이 있은 다음 원형을 그리며 정렬한다. 이어서 전 풍물꾼이 관중에게 인사를 하는 마당굿을 하고 반죽굿·도드레기·영풍굿·허허굿·기러기굿·판굿·채굿진굿을 거쳐 지신굿으로 놀이를 끝낸다.
줄다리기는 정월 대보름을 전후해 행해지는데, 정초부터 집집마다 짚단을 얻어 가지고 지름 20㎝, 길이 100m 정도 되는 동아줄을 만들어 마을의 넓은 공터에서 한다. 이 때 농악이 선두에 서고 관을 쓴 사령이 대장 옷을 입고 행렬을 지휘한다.
줄은 줄 머리를 중심으로 양쪽 줄을 서로 연결시키는데, 앞줄[서쪽이나 북쪽 편의 줄]로 둥그런 모양의 도래를 만들고, 그 속에 숫줄을 넣어 꽂대[비녀목, 길이 2m, 지름 30㎝의 나무]에 질러 넣어 고정시킨다. 꽂대를 꽂으면 꽹과리를 울리고 줄을 당기기 시작한다. 이긴 편은 풍년이 들고 병이 나지 않으며 재앙 없이 한 해를 보낼 수 있다고 믿었다. 이 밖에도 지신밟기·연날리기·호미걸이를 비롯한 많은 민속놀이가 전해 온다.
2. 동제
김천시 남면과 개령면에서는 3월과 9월에 마을이나 시장에서 주최하는 별신제를 지낸다. 봄에는 마을의 평안과 풍년을 빌고, 가을에는 풍년에 대한 감사와 마을의 번영을 기원하는데, 3~5일 동안 마을의 광장이나 시장에서 열린다. 동제 기간에는 마을 입구에 금줄을 치고 집집마다 문전과 마을의 도로에 적토를 뿌린다. 제장에는 천막을 치고 제상을 설치한 뒤에 제문을 바치며, 헌작·분향·축문 읽기·소지 등의 절차가 끝나면 제사에 참례한 사람들이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여흥으로 3일간 무당의 춤과 농악·씨름 등이 벌어진다.
김천시 농소면 월곡리 밤실마을에서는 정월 초이튿날 동제를 지낸다. 부정 타지 않은 사람을 제관으로 해 동짓날 새벽에 마을 뒷산에 있는 ‘찬물샘’에서 목욕하고 산에 올라 마을의 수호신에게 풍년과 안녕을 비는 제를 지낸다. 산정에서 먼저 첫 번째 제를, 마을 남쪽 페구나무 밑에서 두 번째 제를, 마을 북쪽 느티나무 밑에서 세 번째 제를 지냄으로써 동제가 끝난다. 제관으로 뽑힌 사람은 그 해의 부역을 면제시켜 준다. 그 밖에도 김천시 대덕면 연화리를 비롯해 여러 마을에서 동제를 지낸다. 비가 오지 않으면 용추나 하늘이 가까운 산마루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