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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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廣德里 |
영어음역 | Gwangdeok-ri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감문면 광덕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송기동 |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 감문면에 속하는 법정리.
[형성 및 변천]
조선 말 개령군 북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탄동(炭洞)·가척(加尺)·장내(牆內)가 통합되어 김천군 곡송면 광덕동으로 개편되었다. 1934년 곡송면과 위량면을 통합하여 신설된 감문면 관할이 되었고, 1949년 금릉군 감문면 광덕동으로 개칭되었다. 1971년 가척이 광덕1동, 탄동·장내가 광덕2동으로 분동되었고, 1988년 동(洞)을 리로 바꾸어 광덕리가 되었으며, 1995년 김천시 감문면 광덕리가 되었다.
[자연 환경]
감문면에서 가장 고지대 마을로 구미시 무을면으로 넘어가는 길목인 우태산(牛泰山) 동쪽 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동쪽에 광덕산이 솟아 있고, 마을 뒤로 감문면 최대의 저수지인 광덕저수지가 있다.
[현황]
광덕리는 감문면 소재지에서 동쪽으로 약 5㎞ 떨어져 있다. 2010년 11월 30일 기준 면적은 6.99㎢이며, 2015년 12월 31일 현재 인구는 총 123세대에 228명(남자 114명, 여자 114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동쪽으로 덕남리, 서쪽으로 삼성리, 남쪽으로 성촌리, 북쪽으로 구미시 무을면과 이웃하고 있다. 광덕1리·장내·탄동 세 개 행정리로 이루어졌으며, 밀양 박씨·영월 엄씨·김해 김씨 집성촌이다. 광덕저수지 아래로 넓은 평야가 펼쳐 있어 벼농사가 발달하였고 최근에는 참외와 포도를 주로 재배한다.
문화 유적으로는 보물 제679호인 김천 광덕리 석조보살입상, 광덕리 고인돌군이 있다. 탄동에 있는 반석(盤石)은 정유공(鄭由恭)과 임달(林達)이란 사람이 명당을 찾는 과정에서 반석 위에서 잠을 자다가 임달이 흑룡과 황룡 꿈을 꾼 후에 각기 마을을 개척했다는 전설이 전해 오는 바위로 마을 주민들이 귀하게 여긴다.
자연 마을로는 가척·장내·탄동이 있다. 가척은 주민들이 안터에 살 당시 산적이 자주 출몰해 주민을 괴롭히자 지금의 터로 옮기면서 한 자[尺]의 땅이라도 더[加]늘려서 잘살아 보자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가척 서북쪽에 솟은 우태산은 풍수적으로 볼 때 소의 형상이고 마을회관 옆 공동 우물이 소의 젖에 해당하는지라 고지대임에도 늘 맑고 풍부한 물이 솟아난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마을이 산간 오지인지라 과거에 주민들이 가난을 면치 못하였는데 한 승려가 마을을 지나다가 당시 미나리밭에 방치된 이 우물을 보고는 소의 젖에 해당하는 소중한 우물을 괄시하여 못사는 것이라고 호통을 친 뒤 주민들이 우물 주변을 단장하니 이후 신기하게도 차츰 가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장내는 조선 숙종 때 평해 황씨 세 세대가 이거하여 살면서 세 집을 하나의 담으로 둘러싸고 대문도 하나만 내어 의좋게 함께 사용해서 붙인 이름이다. 달리 담안 또는 안내라고도 하고, 임진왜란 때 임소하 장군을 잡기 위해 마을을 내려가던 왜병들이 노파의 고변 덕에 장군을 해하고 가던 길을 돌아 나갔다 하여 도랑골이란 지명으로도 불린다. 마을회관 앞에는 조선 숙종 때 황명로(黃命魯)가 심은 느티나무가 있다. 이 나무 덕에 훗날 주민들이 더운 여름을 시원하게 날 수 있었다 하여 ‘여름을 차게 해 주는 정자’라는 뜻에서 하한정(夏寒亭)으로 불리었다.
탄동은 조선 초 해주 정씨가 난을 피해 와 살면서, 정씨(鄭氏)는 오행(五行)으로 화성(火姓)에 해당하므로 ‘불 화(火)’자가 들어 있으며 또 땅에 묻어도 변함이 없는 숯과 같이 고고한 충절과 효심을 간직하자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가척으로 이어지는 골짜기를 따라 마을이 들어서 있으며, 김천의 향토지인 『탄동지(炭洞誌)』가 집필된 마을이다.
마을을 개척할 때 느티나무를 심어 마을이 있음을 알렸는데 지금도 마을 어귀에 웅장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이 느티나무는 옛날 인근 현의 수령들이 부임할 때마다 나무에 관인(官印)을 걸어 놓고 인수인계를 했다 하여 오수정(五授亭)으로 도 불리었다. 임진왜란 때 인근 다섯 고을의 수령들이 모여 나무에 관인을 걸어 두고 회의를 했다 하여 오인정(五印亭)이라고도 하였다.
느티나무 위쪽 광덕저수지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탄동지로 기록되어 있으며 여우우물의 전설이 깃든 유서 깊은 못이다. 전설에 따르면, 1456년(세조 2) 인근 마을에 유가희라는 노처녀가 살았는데 조금 모자란 노총각과 정을 통하게 되었다. 이를 알아차린 처녀의 아버지 유호달이 총각을 우물로 유인하여 우물 속으로 밀어 넣어 버렸다. 그 이후부터 비가 오는 날이면 우물에서 여우 우는 소리가 들려 여우우물이라 불렀다. 지금 우물 일대는 광활한 광덕저수지로 변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