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2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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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能治里 |
영어음역 | Neungchi-ri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어모면 능치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송기동 |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 어모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능점(能店)의 ‘능(能)’자와 도치량(道治良)의 ‘치(治)’자를 따서 능치(能治)라 하였다.
[형성 및 변천]
조선 말 김산군 구소요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능점·능청(能靑)·도치량·용문산(容門山)이 통합되어 김천군 구소요면 능치동으로 개편되었다. 1934년 아천면과 구소요면을 통합하여 신설된 어모면 관할이 되었고 1949년 금릉군 어모면 능치동이 되었다. 1971년 능치1동·능치2동·능치3동으로 분동되었고, 1988년 동(洞)을 리로 바꾸어 능치리가 되었으며, 1995년 김천시 어모면 능치리가 되었다.
[현황]
능치리는 어모면 소재지인 중왕리에서 10㎞ 떨어져 있다. 2010년 11월 30일 기준 면적은 10.44㎢이며, 2015년 12월 31일 현재 인구는 총 373세대에 788명(남자 397명, 여자 391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동쪽으로 옥계리, 서쪽으로 충청북도 영동군과 이웃하고 있다. 능치1리·능치2리·능치3리·능치4리 네 개 행정리로 이루어졌으며, 어모면 최대의 마을로 대대로 밀양 박씨가 세거해 오고 있다. 최근에는 신앙촌이 형성되어 기도원과 교회가 많다. 사방이 용문산을 비롯한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산악 지대여서 사과와 배를 주로 재배하고 있다.
자연 마을로는 능청·능점·도치량·용문산 등이 있다. 능청은 능점 동쪽에 자리 잡아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항상 푸르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1889년 밀양 박씨 박형희(朴亨熙)가 상주시 공성면에서 옮겨 와 살기 시작한 이래 함양 여씨·풍양 조씨가 차례로 입향하였다. 마을 입구 보건소 뒤로는 옥계1리 미륵당으로 넘어가는 야트막한 야산이 있다. 옛날 무사들이 맞은편 모래밭에서 활을 쏠 때 이곳에 과녁을 세워 두었다고 전해지는 곳으로, 산세가 소의 등처럼 구부러져 있고 활 쏘는 광경을 구경하기 위해 소를 타고 넘나들었다 하여 소태말장·소타말기고개 등으로 불렀다.
소태말장에서 조금 내려와 도로를 건너면 능치천의 아름다운 절경지로 꼽히는 옥소(玉沼)가 있다. 근년에 도로를 확장하면서 예전의 절경이 많이 훼손되었지만 괴석 사이를 굽이쳐 흐르는 물소리와 경치는 단연 압권이다. 옛날에는 선비들이 옥소에 모여 시를 짓기도 하고 광대를 불러 양 계곡에 줄을 매어 줄타기 곡예도 곧잘 벌였다.
능점은 1568년과 1578년에 각각 평택 임씨와 경주 최씨가 입향해 이루어진 마을로, 옛날 도자기를 생산하는 도공들이 모여 살면서 능히 한 마을을 이루었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능치천을 건너면 사기그릇을 가장 먼저 만든 곳으로 알려진 사기점골, 생산된 도자기를 모아 놓고 판매했다는 노루목골 등 도자기와 관련된 지명이 전해 오며, 지금도 땅을 파면 수많은 도자기 파편이 나온다고 한다. 마을 주민은 당시 막대하게 소요됐을 흙을 어디에서 조달했는지 의문이라고 했다.
도치량은 강릉 유씨가 임진왜란 때 난을 피해 마을로 들어와 살기 시작한 이래 김녕 김씨·밀양 박씨가 차례로 입향하여 정착하였다. 예부터 옻나무가 많아 이를 채취해 옻칠을 하는 행랑채, 즉 ‘칠 도(塗)’자와 ‘옻나무 칠(漆)’자, ‘행랑채 랑(廊)’자를 써서 도칠랑(塗漆廊)이라 일컬은 공방이 있어 마을 이름도 도칠랑이라 하였는데, 1779년 박치(朴治)라는 선비가 도치랑(道治郞)으로 고치었고, 1900년대 들어 종교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도치량으로 고치었다. 용문산은 도치량 위에 있는 마을로 옛날 절과 민가 몇 집이 있어 용문산(龍門山)으로 불렸는데 1940년 나운몽 목사가 들어와 용문산(容門山)으로 고치고 지역 최대의 신앙촌을 조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