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3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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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城里 |
영어음역 | Yuseong-ri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증산면 유성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배순분 |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 증산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자연 마을인 유성을 1914년 행정 구역을 개편하면서 법정리 명칭으로 하였다. 유성은 버드나무가 성곽처럼 마을을 에워싸고 있어 부르게 된 이름이다.
[형성 및 변천]
조선 말 성주군 내증산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옥동(玉洞)·유성(柳城)·지소(紙所)가 통합되어 김천군 증산면 유성리로 개편되었고, 1949년 금릉군 증산면 유성리가 되었다. 1973년 옥동이 유성1리, 유성·지소가 유성2리로 나누어졌고, 1995년 김천시 증산면 유성리가 되었다.
[자연 환경]
시루봉을 비롯한 많은 고봉들이 마을을 에워싸고 있어 절경을 이루고 수도산과 황항리에서 발원한 대가천과 남암천이 마을 앞에서 합류한다.
[현황]
유성리는 증산면 소재지로 2010년 11월 30일 기준 면적은 5.41㎢이며, 2015년 12월 31일 현재 인구는 총 134세대에 250명(남자 118명, 여자 132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서쪽으로 평촌리, 남쪽으로 금곡리, 북쪽으로 황정리와 이웃하고 있다. 유성1리·유성2리 두 개 행정리로 이루어졌으며 김해 김씨 집성촌이다. 국도 30호선과 지방도 903호선이 교차하여 교통이 편리하며, 경작지가 좁고 일찍이 잎담배 등 특용 작물을 주로 재배해 왔다.
지금의 증산면사무소 자리는 청암사와 수도암의 본사였던 대가람 쌍계사(雙溪寺)가 있던 곳이다. 1951년 7월 14일 6·25전쟁 중 임시로 증산면사무소로 쓰이다가 북한군 패잔병들이 불을 질러 완전히 소실되었는데, 당시 불타는 쌍계사를 목격한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스무 시간을 넘게 탔다고 한다.
증산면사무소 뒤에 있던 쌍계사 대웅전은 인근 마을 장정들이 돌팔매질 내기를 하여 지붕을 넘기는 이가 없을 정도로 규모가 커서 이름을 떨쳤고, 대웅전 내부에 있던 후불탱화 네 폭도 유명하였다. 지금도 주춧돌 여덟 개와 배례석이 남아 있어 당시의 위용을 짐작하게 한다. 쌍계사의 사세가 한창 좋을 때는 승려가 1,000명가량 되어 쌀을 씻으면 쌀뜨물이 성주군 금수면 영천리까지 흘러갔다고 한다. 직지성보박물관에는 ‘쌍계사’라고 선명하게 새겨진 동종이 보관되어 있고 인근 대덕중학교 증산분교장 교정에는 쌍계사 당간지주와 대형 맷돌이 있다.
쌍계사 터는 예로부터 앞과 뒤로 호랑이와 용의 사이에 놓인 길지로 알려져 있는데 그 터와 관련해 승(僧) 천 년, 속(俗) 천 년이라는 예언이 전해 온다. 쌍계사가 창건된 지 1100년 후인 1951년에 소실되었고 그 터에 지금과 같이 마을이 들어선 것을 보면 예사롭지 않은 예언으로 여겨진다.
자연 마을로는 옥동·유성·지소 등이 있다. 옥동은 영남 예학을 계승한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가 중국 송나라 주희(朱熹)가 노래한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떠 「무흘구곡」을 지을 때 “냇물이 마치 구슬이 흘러가는 듯하다.”고 노래하여 옥류동(玉流洞)이라 한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유성은 옥동에서 백천교를 건너 목통천 변에 자리한 마을로 임진왜란 때 선비 황상원(黃相元)이 피난 와서 정착하면서 형성되었다. 당시 마을 앞에 버드나무가 숲을 이루어 이를 개간해 밭을 일구었다. 버들밭, 버드나무가 성곽처럼 마을을 에워싸고 있어 유성이라 하였다. 또 뒤에 증산면 소재지가 유성1리 옥동으로 정해진 뒤 유성리에 속하는 인근 마을들의 본디 마을이란 뜻에서 원유성(元柳城)이라고도 하였다.
지소는 예부터 한지를 생산하는 장인촌으로 유명하였다. 처음에는 이웃한 쌍계사를 중심으로 사찰에만 공급하다가 품질이 좋다는 평판이 나면서 조선 말기까지 나라에 공물로 공급하였다. 수도계곡 일대에 자생하던 풍부한 닥나무와 대가천의 맑은 물이 양질의 한지를 생산하는 바탕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마을 이름에 ‘종이 지(紙)’자가 들어간 것도 한지 생산과 관련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 동안리 대덕중학교 증산분교장 교정에는 이후취원지소선정비(李侯冣原紙所善政碑)가 서 있다. 원래 지소 앞에 있다가 오래전 수해로 유실되었다 발견되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이 비에 대한 정확한 내력을 알 길은 없으나 이취원(李冣原)이라는 관리가 지소에 선정을 베풀어 병방, 공방, 호장, 이방, 도감 등의 아전들이 감사의 뜻으로 세운 것으로 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