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4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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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吉云節反亂 |
영어음역 | Gir Unjeol Ballan |
영어의미역 | Gil Unjeol Rebellio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호동 |
발생|시작 | 1601년 6월 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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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 장소 | 경상북도 김천시 |
종결 장소 | 경상북도 김천시 |
성격 | 반역 사건 |
관련 인물/단체 | 길운절|소덕유 |
[정의]
1601년 김천 출신의 길운절(吉云節)이 일으킨 반역 사건.
[개설]
길운절[?~1601]은 개령현 아포 제석리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살다가 패륜아로서 횡포가 심하여 유생들에 의해 쫓겨나 선산으로 이주하였다. 1601년(선조 34) 정여립(鄭汝立)의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된 소덕유(蘇德兪)[정여립의 척분]를 찾아가 함께 모반을 도모하였다.
[역사적 배경]
임진왜란 직전인 1589년(선조 22)에 있었던 기축옥사의 주모자 정여립의 사촌 처남인 소덕유는 연좌죄로 몰리자 삭발하고 중이 되어 각지를 전전하였다. 정유재란이 끝나고 승군장이 된 소덕유는 승군을 이끌고 금오산성을 수축한다는 명목으로 선산에서 길운절의 집에 기숙하면서 그와 의기투합하였다. 길운절과 소덕유는 정여립의 거사 장소가 사방으로 통하는 호남 지방이었기 때문에 쉽게 탄로난 것이라 여기고, 벽지 절역인 제주를 택하여 거사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소덕유가 먼저 제주도로 건너가 일이 순조롭게 되면 길운절을 부르기로 하였다.
[경과]
제주도에 들어간 소덕유는 동참자를 모집하여 길운절을 불러서 1601년 6월 4일 제주 납마첨지 문충기 등과 숙의 끝에 6월 6일을 기하여 기병하고 제주목사와 한양에서 온 관리를 모두 없애고 군마와 군량미를 징발하여 제주도를 장악한 뒤 육지로 건너가 한양으로 진격하자고 결의하였다. 그러나 길운절은 일이 새어나갈 기미가 있고, 설혹 성공하더라도 병권을 쥔 문충기 등에게로 공로가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여 고변하였다.
제주목사 조경(趙儆)은 고변을 접하고 괴수 등 18명의 연루자를 일망타진하여 한양으로 압송하고, 길운절의 자백에 따라 육지의 공모자를 잡아 압송하였다. 역모자 20여 명은 4년 2개월 동안 의금부에 구금되어 국문을 받고 처형당하였지만 길운절은 먼저 고변하였으므로 용서를 받았다. 그렇지만 국가로부터 포상을 받지 못하였음을 원망하다가 체포되어 참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그가 출생한 제석동의 가택을 헐어 못으로 만들었는데, 그 못이 길지이다.
[결과]
길운절 반란으로 인해 길운절의 출생지인 선산부를 현으로 강등하였다가, 길운절의 출생지가 개령임이 밝혀져 선산은 부로 회복되고 개령이 폐현이 되어 김산군에 병합되었다. 1609년(광해군 1) 이유림 등의 유생의 상소가 받아들여져 개령현이 복구되었다. 길운절 반란으로 인해 이언룡·이식·이극·이여림·최문수·이문경 등 개령 출신의 유생들이 무고한 옥고를 치렀다. 길운절이 개령에 살 때 너무 흉패하므로 유림에서 그를 추방하였는데, 길운절이 국문을 받을 때 이 유생들을 연루자로 호명하여 의금부로 압송하였던 것이다. 경상감사에게 이것을 내사하도록 하니 무고임이 판명되어 방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