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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808
한자 鄭以僑
영어음역 Jeong Igyo
이칭/별칭 자미(子美),만취헌(晩翠軒)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병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1468년연표보기
활동 1470년연표보기
활동 1471년연표보기
활동 1472년연표보기
활동 1484년연표보기
활동 1486년연표보기
몰년 1498년연표보기
활동 1498년연표보기
출생지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 인의리 봉계마을 지도보기
유배|이배지 함흥
사당|배향지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 태화리 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연일(延日)
대표 관직 홍문관교리

[정의]

조선 전기 김천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자미(子美), 호는 만취헌(晩翠軒). 할아버지는 정회형(鄭淮衡)이며, 아버지는 성균관사성을 지낸 정종소(鄭從韶)이다. 형은 정이휘(鄭以揮)이며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과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양주목사(楊洲牧使)를 역임하였다. 동생은 정이심(鄭以諶)으로 1486년(성종 17) 정이교와 함께 중시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지평을 지냈다. 여동생은 안동 권씨 권흠조(權欽祖)에게 출가하였다.

정이교는 처음 사직(司直)을 지낸 안동 권치손(權致遜)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고, 부인과 사별한 후 절제사를 지낸 화순의 최한백(崔漢伯)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아들로는 정공징(鄭公徵)·정공건(鄭公虔)·정공필(鄭公弼)·정공청(鄭公淸)·정인후(鄭麟厚)가 있으며, 딸은 성주 배씨 배의범(裵義範)·배사립(裵斯立)에게 출가하였다. 정공징은 한성부서윤을 지냈고, 정공건은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을 지냈다. 정공필은 1518년(중종 13) 무과에 급제하고 통정대부로 영암군수를 역임하고 회령(會寧), 곽산(郭山)의 대도총(帶都總)이 되었다. 정공청은 영산현감(靈山縣監)을 지냈으며, 정인후는 찰방(察訪)을 지냈다. 어머니는 숙인(淑人) 평산 윤씨(平山尹氏)이며, 외할아버지는 참판을 지낸 윤통(尹統)이다.

[활동 사항]

정이교(鄭以僑)[?~1498]는 지금의 김천시 봉산면 인의리 봉계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가학을 통해 학문을 접하였고, 아버지의 절개를 이어받아 곧은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정이교의 아버지 정종소는 성균관사성으로 있다가 단종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자 김천으로 낙향하여 은거하면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이 오천(烏川)의 정선생(鄭先生)이라 부를 정도였으니 정종소의 학덕과 절의를 짐작할 수 있다.

정이교는 1468년(세조 14) 진사과에 합격하고, 1470년(성종 1) 문과에 급제하여 문명을 얻었다. 행예문관검열겸경연전경홍문관정자(行藝文館檢閱兼經筵典經弘文館正字)가 되어 사고(史庫)의 사초(史草)를 정리하고, 『세조실록(世祖實錄)』과 『예종실록(睿宗實錄)』의 찬술에 참여하였다. 1471년(성종 2) 12월 『세조실록』을 수찬한 공로로 1자급이 올랐고, 1472년에는 『예종실록』을 수찬한 공로로 1자급이 올랐다.

1475년(성종 6) 예문관검열 조위(曺偉)가 금주령을 어기고 소를 잡고 유밀과(油蜜果)를 베풀어 풍악을 울렸는데 여기에 참여한 죄로 태(笞) 50대에 해당하는 처벌을 받았다. 그가 기일(忌日)인데도 잔치에 참여하였기 때문이었다. 1482년(성종 13) 이조좌랑으로서 여호(呂箎)를 변론하였다. 여호가 안악군수에 임명된 것에 대해 승정원과 삼사가 합사하여 개차(改差)를 주장하였지만, 정이교는 여호가 과제(科第)에 합격한 사람으로 일찍이 사헌부헌납을 지냈고 조관(朝官)에 익숙하며, 특히 자산군수로 재임할 때의 공적을 근거로 제시하였다. 결국 여호는 개차되지 않았다.

1484년(성종 15) 수사헌부지평이 되었으며, 이때 한성부 가낭청 김당의 불법을 적발하고 파직하게 하였다. 김당은 소나무를 함부로 베어다가 나무로 통을 만들고 가지는 자기 집으로 보내는 비리가 있었고, 또 그전에 이조의 녹사(錄事)로 있으면서 천거하는 단자(單子)를 지우고 다른 사람의 이름을 몰래 기록한 전력도 있었다. 마음씨가 근본적으로 바르지 못한 점을 지적한 것이다.

1486년(성종 17) 이조정랑(吏曹正郞)으로서 중시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장령과 홍문관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487년(성종 18) 왕세자가 입학할 때 가필선(假弼善)으로 참여하여 표피(豹皮) 한 장을 하사받았다. 1488년(성종 19)에는 가례도감의 낭청 일을 수행하고 아마(兒馬) 한 필(匹)을 사급 받았으며, 이후 경상도 영천에 있는 어머니의 봉양을 위해 외직을 구하여 청도군수가 되어 선정을 베풀기도 하였다.

1496년(연산군 2) 사헌부장령으로서 연산군에게 폐비 윤씨를 위한 새로운 사당과 신주를 세우는 일을 철회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여 유자(儒者)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사헌부지평 신복의(辛服義)에 의해 경직(京職)의 관직 제수가 부당하다는 논의가 있었다. 신복의는 정이교를 외임인 함흥군수에 제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다. 1498년(연산군 4) 유자광(柳子光)의 무고로 많은 선비들이 극형을 당하자, 연산군에게 한쪽 말만 듣고 함부로 인재를 제거함은 부당하다는 직언으로 극간하다가 연산군의 분노를 샀다. 1498년 8월 함흥(咸興)으로 귀양을 갔고, 그해 12월 귀양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 같은 정이교의 선비 정신은 일찍이 부모와 동료들과의 교류와 학문에서 비롯되었다. 평소 정경세, 김일손(金馹孫), 조위, 이원례 등 경상도 지역 사림들과 뜻을 같이 하였고, 이들은 진주의 촉석루에서 ‘금란계(金蘭契)’로 결의하고 풍류와 덕업을 닦았다. 이들이 수계한 현판은 지금도 촉석루에 걸려 있다.

[묘소]

묘소는 둘째 부인인 화순 최씨와 함께 합장되어 김천시 봉산면 태화리 태화산(太和山)에 있다. 첫째 부인인 안동 권씨의 묘소는 실전되어 알 수 없다.

[상훈과 추모]

김천시 봉산면 태화리 590번지에 있는 태평재 영모당사(永慕堂祠)에 제향(祭享)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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