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8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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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曺偉 |
영어음역 | Jo Wei |
이칭/별칭 | 태허(太虛),매계(梅溪),문장(文莊)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병우 |
출생 | 145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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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 1472년 |
활동 | 1474년 |
활동 | 1477년 |
활동 | 1479년 |
활동 | 1483년 |
활동 | 1491년 |
활동 | 1492년 |
활동 | 1495년 |
활동 | 1498년 |
몰년 | 1503년 |
추모 | 1506년 |
활동 | 1506년 |
출생지 |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 인의리 |
유배|이배지 | 평안도 의주 |
유배|이배지 | 전라도 순천 |
묘소|단소 |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복전리 마암산 |
사당|배향지 | 경상북도 김천시 성내동 경렴서원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창녕(昌寧) |
대표 관직 | 지중추부사 |
[정의]
조선 전기 김천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태허(太虛), 호는 매계(梅溪). 증조할아버지는 참의에 증직된 조경수(曺敬修)이고, 할아버지는 조심(曺深)이며 아버지는 울진현령 조계문(曺繼門)이다. 어머니는 문화 유씨로 외할아버지는 유문(柳汶)이고, 장인은 신윤범(申允範)이다. 아들로 조사우(曺士虞)를 두었고, 동생으로는 선략장군(宣略將軍) 조윤(曺倫), 효력부위(效力副尉) 조전(曺佺), 사역원정(司譯院正) 조신(曺伸)이 있다. 누나는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에게 시집갔다.
[활동 사항]
조위(曺偉)[1454~1503]는 지금의 김천시 봉산면 인의리 봉계마을에서 태어났다. 7세에 이미 시를 지을 정도로 재주가 뛰어났으며 문장이 뛰어난 서제(庶弟) 조신과 함께 가학을 이어받으면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매형인 김종직에게 나아가 성리학을 배우고, 1464년(세조 10) 상경하여 종부형(從父兄)인 충간공 조석문(曺錫文)의 집에 유숙하면서 수학하였다. 1467년(세조 13) 울진현령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갔으며, 강릉에서 공부를 하다가 1470년(성종 1) 한양으로 돌아왔다. 1472년(성종 3)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에 합격하였고, 이해 김종직과 함께 지리산을 유람하기도 하였다.
21세가 되던 1474년(성종 5) 식년 문과에 병과로 합격하여 성종으로부터 선온(宣醞)의 술을 하사 받았다. 승문원정자와 예문관검열을 역임하면서 신씨와 혼인하였다. 1475년(성종 6) 부산을 유람하다가 상경하였으나 한림연(翰林宴)에서 금지된 고기와 기생과 악공들이 음악을 연주한 죄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살고 있던 김산군에 부처되었다. 1476년(성종 7) 방면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 문신으로 발탁되었고, 동생 조신과 더불어 김천의 직지사에서 독서하였다.
1477년(성종 8) 홍문관정자가 되어 왕의 경연에 사경(司經)으로 참여하면서 『통감강목(通鑑綱目)』을 강하고 의미를 해석하였으며, 기후(氣候)가 지나치게 더우며 천도(天道)가 불순(不順)한 일을 성종이 지적하자 억울한 송사는 판결하는 관리가 제때에 청단하지 않았기 때문이므로 사례를 조사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또한 전국에 향사례(鄕射禮)를 시행하게 하여 백성을 예로 교화할 것을 제안하여 시행하게 하였으며, 성종에게 재예(才藝)보다는 덕행이 뛰어나야 한다고 주청하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홍문관저작을 거쳤다.
1479년(성종 10) 홍문관부수찬이 되어 왕의 명으로 중궁을 폐출하는 교지를 지었으며, 영안도경차관이 되어 지방으로 내려갔다. 조위는 비록 일을 경험하지 않았어도 기질(氣質)이 비상하였고, 나이는 젊어도 노성(老成)한 사람으로 평가를 받았다. 1480년(성종 11) 경연검토관으로 경연에 참여하여 향학(鄕學)의 유생들이 먹을거리가 없어 번(番)을 나누어 독서를 하니 학업에 전념할 수 없으므로 학전(學田)을 지급하여 양육한다면 격려가 되어 성취할 것이라고 주장하여 하삼도[충청도·경상도·전라도]·경기도·강원도의 향교에 학전을 지급하게 하였다.
이해 4월 치른 홍문관 관원들이 보는 시험에서 1등을 하여 칠롱(漆籠)을 상으로 받았다. 그리고 5월의 시험에서 시가 수위를 차지해 활 1장을 받아 문명을 떨쳤다. 이러한 것들은 성종의 총애를 받기에 충분한 조건이었고, 검토관·시독관으로 경연에 참여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또한 성종은 홍문관과 예문관의 당하관 및 주서 등을 인정전 뜰로 불러 동교관렵(東郊觀獵)에 대한 배율 등을 짓게 하였는데, 조위가 송(頌)에서 장원하였고, 「인정전조조(仁政殿早朝)」라는 율시를 짓게 하였을 때 김흔(金訢)과 함께 합격하여 말 한 필을 하사받았다.
1481년(성종 12) 영접사 강희맹(姜希孟)의 종사관이 되었고, 반송사 종사관으로 관서에 가서 변읍의 농사를 복심하였으며, 이때 왕의 명으로 가자(加資)되었다. 이해 12월에 왕명으로 『두시언해(杜詩諺解)』의 서문을 지었다. 1482년 왕의 명으로 ‘유상곡수’에 대한 배율(排律) 20운을 지었으나 권건(權健)의 것과 맞먹어 다시 ‘옥당춘흥(玉堂春興)’의 10운(韻)을 지어 수석을 차지하여 마장(馬粧)을 상으로 받았다. 조위는 다시 한 자급이 올랐으며, 글재주로 쓸 만한 인물로 평가를 받았다.
조위는 시독관으로 참여한 경연에서 어진 선비를 탁용하도록 청하였다. 일민(逸民)을 찾아내어 채용하여 선비들의 구진(求進)하는 기풍을 바로잡고자 한 것이다. 이후에는 사헌부지평을 지냈다. 이해 8월 의정부, 육조, 대간이 권경우(權景祐)가 폐비 윤씨를 옹호한 것을 의논하자 언로를 넓혀야 하는 의미에서 반대 의견을 개진하였다. 그러면서 충무위(忠武衛)의 폐단을 설명하고, 양희지(楊熙止)와 정석견(鄭錫堅)을 천거해 서용하게 하였다. 또한 김우겸이 과거에 응시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장리의 자손이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불허하게 하였다.
1483년(성종 14) 시강원문학과 홍문관부응교가 되었으며, 시장(詩章)을 잘하는 인물로 지목되었다. 이해 6월 아버지의 나이가 70세가 넘었기 때문에 돌아가 봉양하겠다며 사직하였다. 왕은 조위가 외아들이라는 점을 들어 고향 가까운 곳의 수령으로 차출하게 하여 함양군수가 되었다. 이때 한명회(韓明澮)는 조위를 향별감으로 차출하고자 하였으나 왕이 거부하였다. 한명회는 조위의 시문 능력을 높이 평가해 인재로 양성하려는 뜻이었다. 조위는 함양군수로 선정을 베풀었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표리(表裏)·녹피(鹿皮) 등을 상으로 받았다.
1485년(성종 16) 경상도관찰사 이극기(李克基)가 함양군수 조위와 전 거창현감 유호인(兪好仁)이 지은 시(詩)를 책으로 만들어 왕에게 바쳤다. 이에 성종은 조위와 유호인의 부모에게 쌀과 글을 내려 칭찬하고자 한다는 전교를 내리고 관찰사를 통해 각각 15석(碩)의 쌀과 콩을 주었다.
1487년(성종 18) 조위는 집에다 외읍(外邑)의 기녀(妓女)를 두고서 첩으로 삼은 죄로 추고를 받았으나, 1488년에는 왕이 어버이에게 식물(食物)을 보내 주었다. 왕이 보낸 물품은 쌀 4석(碩), 황두(黃豆) 2석(碩), 식염(食鹽) 5석(碩), 미역 1상(箱), 청주(淸酒) 10병(甁) 등이었다. 이듬해 부친상을 당해 지극으로 상주에 임하였다. 1491년(성종 22) 복을 벗고 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에 제수되어 상경하여 사헌부장령, 승정원동부승지가 되었다.
조위는 본디 성품이 너그럽고 유순하여 남을 후려치는 인재(人才)가 아니어서 대관(臺官)이 되었지만 사사롭게 논핵(論劾)하는 일이 없었다. 1492년(성종 23) 승정원의 우승지와 좌승지를 거쳐 12월에는 승정원도승지가 되었다. 1493년 왕은 조위에게 당체사모(唐體紗帽)를 내리고, 의관을 중국 제도에 따르게 하였다. 왕은 조위의 문예를 높이 평가하여 정조사를 제수하였으나 친로(親老)를 핑계로 사직하고 김천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은거하면서 『매계집(梅溪集)』을 짓기 시작하였으나 호조참판이 되어 상경하였다. 이해 말에 충청도관찰사를 제수받아 1494년 1월에 하직하고 외방으로 나갔다.
1495년 연산군이 즉위하고 한성부우윤과 성균관대사성이 되었으며 『성종실록(成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때 사관 김일손(金馹孫)이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수록하여 올리자 원문대로 받아들여 편찬하게 하였다. 1498년(연산군 4) 동지중추부사겸부총관(同知中樞府事兼副摠管)이 되었고, 성절사로 북경에 갔다. 조위가 돌아오기 전에 무오사화가 일어나 김종직의 시고(詩稿)를 수찬한 장본인이라 하여 의주에서 체포 투옥되었다.
윤필상(尹弼商)과 이극균(李克均)의 극간으로 죽음을 면하고 의주로 유배되었다. 1500년(연산군 6) 김굉필(金宏弼)과 함께 전라도 순천에 이배되어 도의를 강론하다가 1503년(연산군 9) 귀양지에서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조위는 황간 마암산에 묻혔으나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면서 부관참시되었다. 연산군은 조위가 지은 『두시언해』의 서문마저 삭제하였으며, 1505년 그의 족친을 찾아 국문하였고 결죄하여 배소로 돌려보냈다. 조위는 성리학의 대가로서 당시 사림 사이에서 대학자로 추앙되었고, 김종직과 더불어 신진사류(新進士類)의 지도자였다. 조위가 거처하던 김천 율수재(聿修齋)가 김천시 봉산면 인의리 187번지에 남아 있다.
[학문 및 저술]
저서로는 『매계집』이 있고, 「만분가(萬憤歌)」가 있다. 그리고 『두시언해』의 서문과 『매계총화(梅溪叢話)』, 「조계문 묘비(曺繼門墓碑)」를 지었으며, 왕명으로 「독서당기」와 송도를 유람하고 「송도록」을 남겼다.
[묘소]
묘소는 김천시 대항면 복전리 마암산에 있다.
[상훈과 추모]
1506년 중종은 조위의 신원을 회복하고 치제하게 하였으며, 이조참판을 증직하였다. 또한 1511년 문집을 모아 편집하여 개간하게 하였고, 1708년 숙종은 순천 유생들의 상소를 받아들여 이조판서를 증직하고 문장(文莊)의 시호를 내렸다. 문집인 『매계집』은 1718년 간행되었다. 황간(黃澗)의 송계서원(松溪書院)과 김천시 성내동에 있던 경렴서원(景濂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