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8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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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林千江 |
영어음역 | Bae Heungrip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손경희 |
출생지 |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복전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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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 | 경상북도 김천시 자산동 계적사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이조참의 |
[정의]
조선 후기 김천 출신의 의병.
[활동 사항]
임천강(林千江)은 본관은 나주(羅州)이며, 지금의 김천시 대항면 복전리에서 태어났다. 김천의 역리(驛吏)였다. 1566년(명종 21) 강사상이 경상감사로 부임할 때 진주로 수행하다가 덕산에서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을 만났다. 이때 남명이 임천강에게 “향리나 역리는 모두 고려 때 충신의 후손인데, 향리는 과거에 응할 수 있고 역리는 그렇지 못함은 역리들이 직무에 몹시 시달려 과거를 포기하였기 때문이라면서 『경국대전(經國大典)』의 본뜻은 그렇지 않다.”라고 일깨워 주었다. 이 말을 듣고 임천강은 설원을 맹세하였다.
3년 후 신임 군수를 맞으러 상경할 때 그 역시 남명과 같은 말을 하였다. 임천강은 이로부터 신명을 바쳐서라도 개혁을 상소하리라 작심하고 동지 규합에 나서 영남·호남·호서·관동을 헤맨 끝에 12년 만인 1580년(선조 13) 늙은 역리 김숙량을 만나 거사에 합의하였다.
1581년(선조 19) 왕이 헌릉에 행행하였다가 환궁하였음을 알고 나아가 상소문을 올렸다. 이 일로 조야의 의논이 분분하였고, 조정은 조정대로 법전을 참고하여 역리의 조상까지 추적해 결국 11년 만인 1591년(선조 24) 역리의 과거 응시를 허락받았다. 임천강은 판결문을 향탁에 모시고 사배하며 울었으며, 이후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다가 임진왜란에는 창의(倡義)하여 전공을 세워 공신록에 오르고 벼슬이 이조참의에 이르렀다.
[상훈과 추모]
역리들이 지금의 김천시 자산동에 계적사(啓迪祠)를 짓고 은덕을 추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