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927 |
---|---|
한자 | 李秉一 |
영어음역 | Yi Byeongil |
이칭/별칭 | 이진갑(李進甲),목촌청(木村淸)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송호상 |
출생 | 1912년 7월 5일 |
---|---|
활동 | 1919년 |
활동 | 1928년 |
수학 | 1928년 4월 |
활동 | 1929년 7월 |
활동 | 1929년 7월 |
활동 | 1931년 4월 |
활동 | 1932년 8월 |
활동 | 1933년 4월 |
활동 | 1933년 5월 |
활동 | 1934년 3월 |
활동 | 1938년 2월 |
출생지 | 경상북도 김천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3·1 운동 참가|조선공산당 김천그룹 재건협의회 조직 |
[정의]
일제 강점기 김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이병일(李秉一)은 1912년 7월 5일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에서 태어났다. 이진갑(李進甲) 또는 목촌청(木村淸)으로도 불렸다.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여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 1928년 4월 서울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하여 재학하면서 서울의 조선철도주식회사에서 급사로 일했다. 1929년 7월 선린상업학교를 중퇴하고 조선철도주식회사 김천기관구 기관부로 취직했다.
1931년 1월 사직하고 4월에 일본으로 건너간 이병일은 도쿄[東京]에 있는 이와쿠라철도학교 예과에 편입했다. 7월 귀국하여 서울 위생시험관에서 잠시 일하다가 다시 김천으로 내려온 이병일은 조선공산당 김천그룹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1932년 8월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으나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조선공산당 김천그룹은 이병일이 1931년 2월 부산방직 파업 사건에 관여한 임종업이 출옥한 후 지역의 청년 활동가 나정운·백낙도·김창식 등과 함께 조직했으나 이병일 등 주도적인 인물들이 검거되면서 활동이 중단되었다. 그러나 검거되지 않은 회원들을 중심으로 비밀 활동이 계속되다가 1932년 10월 기존의 독서회를 확대 개편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이병일이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병일은 회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1933년 1월부터 2월까지 정동필(鄭東弼)과 협의해 좌익 출판물을 다량 입수하여 대중에게 반포할 것을 협의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병일과 정동필은 서울에 있는 사회실정조사소(社會實情調査所)와 신흥문화사(新興文化社), 대중사(大衆社) 등에서 『이러타(IReoTa)』 약 40부, 『휴식장』 약 20부, 『대중』 약 60부를 구입하여 김복윤 외 16명에게 배포하였다.
이후 이병일은 김종택·김시동과 협의하여 1933년 3월 상순 김천 지역의 소시민들을 조직화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김종택은 김천시장 상인들로 조직된 ‘태극명성계’를 끌어들이기 위해 5월부터 태극명성계에 교양부를 설치한 후 자신이 지도자가 되어 『신단계(新段階)』·『대중(大衆)』·『별이 되라』 등의 책을 구입하여 계원들에게 돌려가며 읽혔다.
1933년 4월 이병일은 출옥한 황태성·백낙도·나정운 등과 김천읍 금정 뒷산[속칭 사산(蛇山)]에서 모임을 갖고 조선공산당 김천그룹의 뒤를 잇는 비밀 결사 ‘조선공산당 김천그룹 재건협의회’를 조직하였다. 조선공산당 김천그룹 재건협의회의 ‘운수노동 및 학생부’를 담당한 이병일은 1933년 5월 임재화(林在華)와 협력해 김천소비조합 점원 정준용(鄭駿鎔) 이하 세 명과 함께 김천읍 욱정에 있는 임학수(林學守)의 집에서 비밀 결사 적우그룹(赤友그룹)[적색그룹(赤色그룹)]을 조직하였다. 그러고는 그룹원들에게 좌익 서적을 읽게 하는 한편, 김천소비조합 내부의 부정한 내용을 탐사케 하여 조합을 접수할 계획을 세웠다.
당시 이병일은 「반전론(反戰論)」이라는 제목의 원고에서 “현하 몰락 과정에 있는 자본주의가 그 여명(餘命)을 연장하기 위해서 식민지를 획득하고 단말마적 항쟁으로 인하여 전쟁을 야기할 것이지만 전쟁은 막대한 재산과 노동 대중의 인명을 희생하고 특권 계급의 사복을 채움으로써 인류에게 막대한 죄악이다.”라는 논지의 원고를 회원들에게 돌려 읽히며 반전 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1934년 3월 안동 역부로 있는 독서회 동지 박준용과 함께 김천역 공우회(工友會)에 가입하여 역 종업원들과 함께 ‘그룹’을 조직하여 활동을 전개하던 중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1938년 2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