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11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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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紫東書院 |
영어음역 | Jadong Seowon |
영어의미역 | Jadong Private Confucian Academy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조마면 강곡리 823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임삼조 |
건립 | 181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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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철|철거 | 1868년 |
개축|증축 | 1927년 |
현 소재지 | 경상북도 김천시 조마면 강곡리 823 |
성격 | 서원 |
소유자 | 진주 강씨 문중 |
관리자 | 진주 강씨 문중 |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 조마면 강곡리에 있는 조선 후기 서원.
[개설]
자동서원은 강설(姜渫)·강여호(姜汝㦿)·강석구(姜碩龜)·강이하를 배향한 서원이다. 남와 강설은 1612년(광해군 4)에 증광 진사시에 합격하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는 기호 지방 선비들의 의병장으로 추대 받은 바 있다. 1628년 김산에 들어와 지금의 구성면 광명리에 거처를 정하고, 정한강 문하에서 수학하여 수신제가하고 도의교우하며, 사친이효하고, 겸공으로 교자손하였다. 특히 1592년 임진왜란으로 김산향교가 소실되었으나 1634년(인조 12) 향내 유림의 협조를 얻어 대성전과 명륜당을 재건하고, 유지를 받들어 아들 강여구가 동재·서재와 묘문을 복원하였다.
기재 강여호(1619~1683)는 강설의 아들로, 1654년(효종 5)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사간원정언·사헌부장령을 거쳐 판결사(判決事)를 지냈다. 함경도 종성부사로 있을 때 임금이 그의 직언을 요청하자, 시폐(時弊) 수천 언을 문장으로 진언하였다. 청렴결백하여 물품을 주고받을 때에는 반드시 의(義)로 하였으며 봉급에 남는 것이 있으면 친척에게 나누어주었다. 종성부사의 임기를 끝내고 돌아올 때 소지품은 침구(寢具)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을 만큼 청렴하였다.
학암 강석구는 이곳에서 태어나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로 나아가 선정을 베풀고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으며 시정(施政) 10개안을 제안하여 채택되기도 했다. 호은 강이하는 1741년에 이곳에서 태어난 선비로 경술예학(經述禮學)에 통달하고 성리학에 밝은 학자로 10권의 문집을 남긴 인물이다.
[위치]
자동서원은 김천시 조마면 강곡2리 강평마을 동쪽 끝에 있다.
[변천]
도남서원 원장 김기찬[전 사헌부정언], 사양서원 원장 이동필[안동], 병산서원 원장 도유사 이제[안동], 매림서원 원장 박민국[안동], 낙봉서원 원장 김태온[안동], 동락서원 원장 장수훈[안동], 권진한[예천], 권상규[함창], 조택수[상주], 남명택[선산], 정인희[용궁], 권충언[안동] 등 555명의 영남 내 서원과 유림들이 1804년(순조 4) 12월 6일부터 1806년(순조 6) 9월 3일에 걸쳐 발의하여 서원 건립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였다.
공사를 시작한 지 5년 뒤인 1811년(순조 11)에 준공하여 강당을 자동서원이라 칭하고, 사우를 상의사라고 남와 강설과 기재 강여호를 향사하였다. “서원이 자산 아래 동쪽에 앉았다”라고 해서 자동서원이라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1868년(고종 5) 서원 철폐령으로 인해 서원 일부가 훼철되었다. 그 뒤 1927년 그 자리에 중수·복원되었다. 복위되면서 강설·강여호뿐 아니라 강석구·강이하도 함께 추향하였다.
[형태]
서원은 약 100여 평의 땅에 담장으로 강학 공간과 제향 공간을 구분하였으며, 강학 공간과 제향 공간이 일자(一字)로 배치된 형태이다. 강학 공간에는 강당과 대문이 남아 있다. 강당의 기둥들 중 일부는 오래되어 최근에 교체되었다. 대문에는 ‘제창문’이라는 현판이, 강당에는 ‘자동서원(紫東書院)’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제향 공간에는 사당과 삼문을 설치하였다. 사당에는 ‘상의사(尙懿祠)’, 외삼문에는 ‘헌명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외삼문 앞에는 자동서원 수호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자동서원은 풍수적 입지에서 건립되었다. 풍수적으로 자동서원이 위치한 곳이 용이 뒤틀린 형상이라, 사당 옆에 인공 연못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동네 냇가와 인공 연못이 연결되어 있어 연못에 물이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984년 서원 앞에 새로운 길이 개설되고 경지 정리가 됨으로써 냇가가 없어져 현재 연못에 물이 차지 않는다고 한다. 서원 앞에는 아름드리나무, 소나무들이 많이 심어져 있었으나, 현재는 거의 사라지고 몇 그루 남아 있지 않다.
[현황]
1871년 이전에는 강설·강여호, 1927년 복원 뒤에는 그들뿐 아니라 강석구·강이하를 추가하여 현재까지 4인을 배향하고 있다. 향사는 봄, 가을로 이루어졌으나 2000년 무렵부터 음력 3월 상정일에만 지낸다. 향사 참여 인원은 50~60명이다. 선산 김씨, 김해 김씨, 안동 권씨, 화순 최씨, 순천 박씨의 자제들도 자동서원에서 함께 공부하였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공간기에는 60세 이상의 노인들이 이곳에서 한문 공부를 하였다. 그 후 유교에 대한 부정적 생각이 많아지고 서원이 몰락하기 시작했다. 자동서원에 배향된 인물들이 남긴 문집의 출처는 현재 확인할 수 없다. 과거에는 종손이, 현재에는 진주 강씨 종중[회장을 선출]에서 서원을 관리하고 있다. 현재 서원에 소속된 전답으로 서원을 관리하고 있다. 또한 진주 강씨 종중에서는 자동서원의 연혁과 배향된 인물들 담은 「자동서원 약지」를 기록한 것이 전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