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12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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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殷保徐騭旌閭閣 |
영어음역 | Yun Eunbo Seo Jeul Jeongnyeogak |
영어의미역 | Memorial Shrine to Yun Eunbo and Seo Jeul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지례면 교리 52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정혜숙 |
건립 | 143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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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경상북도 김천시 지례면 교리 52 |
성격 | 정려각 |
양식 | 맞배지붕 |
정면 칸수 | 2칸 |
측면 칸수 | 1칸 |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 지례면 교리에 있는 조선 전기 양효위사(兩孝爲師) 윤은보와 서즐의 정려각.
[개설]
고려가 망한 후 지례에 낙향해 제자들을 가르치던 반곡(盤谷) 장지도(張志道)에게는 절효(節孝) 윤은보(尹殷保)와 남계(南渓) 서즐(徐騭)이라는 각별한 두 제자가 있었다. 두 사람은 늘 “우리를 낳은 분은 우리 부모이지만, 우리를 세상에 사람답게 길러준 분은 선생님이시다. 아들 없는 선생님을 우리가 모시지 않으면 어찌 사람이라 하겠는가.” 하며 앞다투어 스승을 모셨다.
두 효자는 스승이 돌아가시자 부모에게 허락을 얻어 친아들의 예로써 3년간 무덤 옆에 움막을 짓고 사는 시묘살이를 했다. 윤은보는 시묘 중 부친이 병석에 눕자 아버지를 간병하기 위해서 돌아갔는데 아버지를 간호함에 잠시도 허리띠를 풀지 않고 정성을 다했다. 다행히 아버지의 병환에 차도가 있자 다시 스승의 묘소로 달려가 시묘를 했다. 끝내 부친이 세상을 뜨자 부친 묘에 시묘하면서 음력 초하룻날과 보름날에는 스승의 묘를 찾았다.
아버지 산소 옆에서 시묘살이를 하던 중 하루는 돌풍이 불어 제상에 놓여 있던 향합(香盒)이 날아갔다. 자기의 정성이 부족하여 향합이 날아가 버렸다고 더욱 부끄러워하며 지성을 다해 시묘살이를 계속하였다. 몇 개월이 지난 후 까마귀가 향합을 물어다 묘 앞에 던져주어 효자의 지성에 까마귀조차 감동했다고 주위에서 감탄했다 한다.
서즐은 3년을 스승의 시묘에 정성을 다했는데 스승의 대상(大祥)[2년째 제삿날]일에 폭설로 길이 막혀 제수를 차리지 못하게 되자 불효를 통탄하고 통곡하니 호랑이가 노루를 몰고 와 제수를 장만하게 되었다는 설이 전해질 만큼 스승에 대해 효를 다했다.
이후 서즐이 부모의 상을 당하자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6년간 시묘살이를 하니 사람들이 두 사람을 하늘이 낸 효자라 하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1432년(세종 14)에 정려(旌閭)가 내렸다. 김천에서 가장 오래된 정려각으로 고쳐 짓기를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위치]
경상북도 김천시 지례면 교리 장터길 87번지 돼지고을 부자가든 뒤편에 위치하고 있다. 들어가는 입구가 분명하지 않아 87-10번지 집을 끼고 뒤로 돌아 좁은 오솔길을 따라 들어가면 나온다.
[형태]
정면 2칸, 측면 1칸으로 되어 있으며, 측면 1칸이 정면 1칸보다 약간 길고 세 면은 홍살로 되어 있고 뒤쪽은 막혀 있다. 맞배지붕의 겹처마로 되어 있다. 정판 왼쪽에는 ‘절효위사후릉참봉윤은보지문(節孝爲師厚陵參奉尹殷保之門)’이, 오른쪽에는 ‘남계위사사연서즐지문(南溪爲師司涓徐騭之門)’이 걸려 있다.
건물 안에는 비석이 없으며 바깥쪽에 거북이 모양의 기단 위에 세워진 비석에 ‘장반곡윤절효서남계삼선생유허비(張盤谷尹節孝徐南溪三先生遺墟碑)’라고 새겨져 있으며 용 문양의 머릿돌이 얹어져 있다. 그 옆에 거북이 모양의 기단 위에 작은 비가 있는데 새겨져 있는 글씨를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현황]
건물 뒤편에는 작은 돌담이 있으며 들어가는 입구에는 양쪽에 돌기둥이 낮게 세워져 있다. 1m 정도 간격으로 돌기둥이 세워져 있으며 쇠로 된 홍살로 이어져 있다. 오솔길과 건물 사이를 이어주는 나무가 놓여 있는데, 너무 낡아서 건너기 힘들다. 뛰어서 건너기에는 약간 위험한 편이다. 입구로 들어가기가 힘들긴 하지만 건물 안과 밖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