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18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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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忠老 |
영어음역 | Yi Chungno |
이칭/별칭 | 직여,해재(海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임삼조 |
[정의]
조선 후기 김천 출신의 유학자.
[가계]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직여, 호는 해재(海齋). 아버지는 이유(李遊)이다. 집안이 대를 이어 주자학을 연구하고 실천하여 ‘사세 학행, 사세 유일’로 명성을 얻었다. 아버지 이유도 형 이혼과 함께 고향에 은거하면서 성리학에 잠심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중종 대에 학행으로 안음현 훈도에 제수되었고, 이조참의에 증직되었다.
아들 이지남[자 성지, 호 후암]은 20세에 사서오경에 통달하였다. 아버지가 『주자절요(朱子節要)』를 저술할 때부터 감화를 받아 과거 시험을 통해 부귀공명을 얻는 것을 버리고 주자학 연구에만 전심하였다. 명유들과 교류하였고 감호(鑑湖) 여대로와는 절친한 사이였으며, 모든 일을 처리하는 데 주서를 규범으로 하였기에 세상에서 ‘주서가’라 불렀다고 한다.
손자 이동준[자 사걸, 호 송재]도 주자학 연구에 전임하였으며, 임진왜란 후 현감 기대익, 감역 성윤덕과 향안(鄕案)을 마련하였다. 또한 제자를 가르치고, 특히 임란왜란 후에 퇴락한 개령 지방의 향풍을 바로잡는 데 힘을 쏟아 군민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인조 때에 학행으로 정릉참봉(靖陵參奉)에 나아갔다가 다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승진되었다.
[활동 사항]
이충로(李忠老)는 지금의 김천시 개령면에서 태어났다. 학행으로 1556년(명종 11) 제릉참봉에, 1662년(선조 35) 사재감참봉(司宰監參奉)에 제수되었다.
[학문과 저술]
이충로는 성품이 순수하고 재예(才藝)가 뛰어났다. 우리나라에서 주자서 간행본이 나타나는 1543년(중종 38)경부터 주자학 연구에 심취하였다. 퇴계 이황의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가 1553년(명종 8)에 나왔고, 그가 학행으로 제릉참봉을 제수 받은 해가 1556년이니 거의 동시에 주자학 연구에 발을 들여놓았다고 할 수 있다. 이충로는 일찍이 선산 해평에서 명종 때의 대학자인 후계(后溪) 김범(金範)의 제자인 고응척(高應陟)[중종 때의 학자이자 시임]과 강마하면서 학문이 더욱 깊어졌다.
저술로는 임진왜란 전 여러 권질의 『주자절요』를 지었다. 김범은 이충로의 『주자절요』를 보고 “주자학을 개척함에 반드시 이 선생[이황]보다 먼저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비록 그 깊이에서 이 선생보다 못한 점이 있더라도 독창적인 관점에서 주자학을 계발한 창의력은 가히 호걸지사라 할 만하다”라면서 극찬하였다. 김범이 학문의 벗이 되길 원하였다고 할 만큼 이충로는 주자학의 일면을 개척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이충로의 『주자절요』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묘소]
묘소는 김천시 감문면 태촌리 완동에 있으며, 송준필이 묘갈문을 지었다.
[상훈과 추모]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고응척은 만사에서 “시렁 가득 주자서로 채웠네”라고 이충로의 학문을 평가하였고, 남계(南溪) 강응철(康應哲)도 만사에서 주자학에서 일가를 이룬 공(功)을 평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