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8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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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呂大老 |
영어음역 | Yeo Daero |
이칭/별칭 | 성우(聖遇),감호(鑑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손경희 |
출생 | 155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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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 1582년 |
활동 | 1583년 |
활동 | 1592년 |
활동 | 1594년 |
활동 | 1607년 |
몰년 | 1619년 |
추모 | 조선 후기[고종] |
출생지 |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
묘소 |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송죽리 |
신도비 |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금평리 |
유허비 |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송죽리 |
서원 |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광명리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이조참의 |
[정의]
조선 후기 김천 출신의 의병장.
[가계]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성우(聖遇), 호는 감호(鑑湖). 아버지는 여응구(呂應龜)이다.
[활동 사항]
여대로(呂大老)[1552~1619]는 지금의 김천시 구성면에서 태어났다. 남명(南溟) 조식(曺植)의 문하생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업을 이루려는 뜻이 남달랐다. 아버지는 늘 “이 아이가 우리 가문을 빛낼 자식”이라고 격려하였다. 8세에 모친상을 당하여서는 범절이 어른에 못지않았다. 1577년(선조 10) 26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극진한 예로 여묘(廬墓)를 하였다. 계모를 섬김에도 친어머니에 견주어 못한 바가 없었다.
1582년(선조 15)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이듬해에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정구(鄭逑)·장현광(張顯光)·정경세(鄭經世) 등과 교의(交誼)를 맺었다. 이이첨(李爾瞻)이 여대로의 명망을 보고 은근히 친교를 원하였지만 만나지 않고 어쩌다 만나게 되면 피해 버렸다고 한다. 이이첨과 짐짓 멀리하여 벼슬길이 저해되었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켜 김면(金沔)·곽재우(郭再佑)·권응성(權應聖) 등과 지례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천거로 지례현감(知禮縣監)이 되고 인근 4읍 5군의 의병장이 되어 향토 수호와 국토방위에 진력하였다.
1594년(선조 27) 의성현령(義城縣令)이 되자 전후의 황폐는 말할 것도 없고 전염병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백성을 위해 봉록을 털어서까지 구제하는 선정을 베풀기도 하였다. 1607년(선조 40) 합천군수(陜川郡守)로 나갔을 때 정인홍(鄭仁弘)의 집이 군계(郡界)에 있었다. 정인홍은 이미 조정 대신이 되어 북인(北人)과 함께 정권을 잡고 조정 일을 함부로 하던 당대의 세도가였다. 하루는 정인홍의 집 앞을 지나니 그가 의관을 갖추고 나와서 향토민으로서 우의를 맺고자 하자 “상공이 어찌 시속에 얽매이고만 있겠습니까?” 하고 읍만 하고 물러났다. 그날은 정인홍도 어찌하지 못하고, 뒷날은 또 그 마음을 떠보려고 종이와 부채를 요청해 왔다.
여대로는 답으로 “가야산 일찍 내린 서리에 닥나무는 말라버렸고 세상의 찌는 듯한 더위 이 산중에도 이르네[倻山霜早 楮木盡枯 世間炎熱 亦到山林].”라는 글을 보냈다. 이 일로 벼슬길을 가로막는 사람이 많아 크게 기용될 기회가 없었다. 뒷날 이이첨과 정인홍이 광해군을 옹립해 변을 일으킬 기미가 보이자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그 뒤 광해군이 폐모하자 사간원정언 오장이 반대하다 귀양을 가게 되었다.
여대로는 귀양 가는 오장에게 부채에 시를 써 전별할 때 “술병 차고 다리에서 옛 벗을 전송해도 타다 남은 풀 봄 오는 것 못 막네. 대장부 세상에 나뉜들 혀야 없으랴만 지사는 세상일 걱정해 몸을 돌보지 않았네. 복숭아꽃 오얏꽃은 훈풍에 생색을 내지만 소나무 대나무는 눈을 이고도 정신 새롭네. 큰 빛은 만고에 근원을 어둡게 못하는 법 머물러 바라보려네 구름 걷히고 옛빛 되살아 남을[佩酒橋頭送故人 燒餘殘草不禁春 丈夫在世誰無舌 志士傷時不爲身 桃李帶風生氣色 松篁擎雪更精神 大陽萬古元難晦 佇見雲收舊彩新].”이라고 읊었다.
여대로는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 잠시 내직에 있었을 뿐 주로 외직에 있었다. 나라에 혼란이 있을 때는 의병을 일으켜 충성을 다하였고, 지방관이 되어서는 백성을 위해 어버이 같은 선정을 베풀었다. 권세에 굴복하지 않고 평생을 의(義)에 살다 갔다.
[묘소]
묘소는 김천시 구성면 송죽리 궁장마을 덕대산에 있다.
[상훈과 추모]
고종조에 이조참의가 증직되었다. 유허비는 김천시 구성면 금평리에 있고, 신도비는 김천시 구성면 송죽리 궁장마을에 있다. 김천시 구성면 광명리에 있는 경양서원(鏡陽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