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18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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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約東遺墟碑 |
영어음역 | Yi Yakdong Yuheobi |
영어의미역 | Stone Monument to Yi Yakdo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양천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창겸 |
관련 인물 생년 | 141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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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몰년 | 1493년 |
건립 | 1846년 4월 |
현 소재지 | 경상북도 김천시 양천동 |
성격 | 유허비 |
관련 인물 | 이약동|홍직필|이석 |
재질 | 오석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120㎝[높이]|40㎝[너비]|15㎝[두께] |
관리자 | 이병택 |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 양천동에 있는 조선 초기의 문신 이약동의 유허비.
[개설]
이약동(李約東)[1416~1493]은 본관이 벽진(碧珍)으로 자는 춘보(春甫), 호는 노촌(老村), 시호는 평정(平靖)이다. 김종직(金宗直), 조위(曺偉) 등과 교분이 깊었다. 1441년(태종 14) 진사시에 합격하고, 1451년(문종 1) 증광문과에 급제한 뒤 사섬시직장(司贍寺直長)을 거쳐 내직과 외직을 두루 지냈다.
1470년(성종 1)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고, 그 뒤 경상좌도수군절도사를 거쳐 1477년(성종 8) 사헌부대사헌이 되어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87년(성종 18) 한성부좌윤·이조참판 등을 거쳐 1489년(성종 19) 개성부유수 등을 지냈고, 1491년(성종 22)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끝으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건립 경위]
이약동 유허비는 1846년(헌종 12) 4월 후손들이 이약동의 유덕을 기리고자 세웠다.
[위치]
국도 3호선을 따라 가다가 하로서원 이정표에서 우회전하여 양천동 입구에 있는 사모바위 건너편 비석군에 포함되어 있다.
[형태]
크기는 높이 120㎝, 너비 40㎝, 두께 15㎝이며 재질은 오석이다.
[금석문]
이약동 유허비 비문은 철종 때 판서를 지낸 문경공(文敬公) 홍직필(洪直弼)이 짓고, 글씨는 이석(李奭)이 썼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 해서체로 새겨져 있다.
“영남의 김산[지금의 김천] 남쪽 15리쯤에 있는 하로촌(賀老村)은 바로 노촌(老村) 이 선생이 거처하시던 옛터이다. 선생은 이곳에서 출생하여 이곳에서 별세하고 이곳에서 제사를 올리니 이는 죽은 뒤에도 고향을 떠나지 않는 의리가 되는 것이며 한문공(韓文公)[당나라의 문장가 한유(韓愈)]이 이야기한바 ‘자손들은 고향을 버리지 않은 것을 법으로 삼고 죽은 다음 묘사(廟社)에서 제사를 지낸다.’
선생의 휘(諱)는 약동(約東)이요 자는 춘보(春甫)이다. 정통(正統) 신유년[1441(세종 23)] 진사가 되고 경태(景泰) 신미년[1451(문종 1)]에 증광문과에 뽑혀서 청현직(淸顯職)에 두루 등용되었으며 다섯 번 지방의 수령을 지냈고 세 번 감영과 병영을 관장하였다. 사이에 또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갔었고 마지막에는 이조참판으로 지중추부사에 승진하여 관직에서 은퇴하고 홍치(弘治) 계축년[1493(성종 24)] 6월 13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78세이다. …”
[현황]
이약동 유허비는 현재 이병택이 관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