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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0718
한자 南以雄
영어음역 Nam Yiung
영어의미역 Nam Yiung
이칭/별칭 적만(敵萬),시북(市北),문정(文貞)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고수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충청남도 공주시
성별
생년 1575년연표보기
몰년 1648년연표보기
본관 의령(宜寧)
대표관직 좌의정

[정의]

조선 중기 충청남도 공주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적만(敵萬), 호는 시북(市北)이다. 아버지는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를 지내고 참판에 추증된 남위(南瑋)이고, 어머니는 청주한씨이다. 6형제 가운데 셋째로 아버지의 6촌인 남대우(南大佑)[영의정과 의흥부원군에 추증됨]의 양자가 되었으며, 양모는 영일정씨이다.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안주성에서 최후를 마친 남이흥(南以興), 인조(仁祖) 때 소북(小北)의 영수였던 남이공(南以恭) 등과는 생가 쪽으로 4촌간이다.

[활동사항]

1606년(선조 39) 진사시에 급제하여 이듬해 왕자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세마(洗馬)·위수(衛率)·통례(通禮)를 거쳐 1613년(광해군 5) 증광문과 병과에 급제, 예조좌랑·병조좌랑·정언·수찬·응교 등을 지냈다. 정언으로 있을 때 이이첨(李爾瞻)을 꾸짖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오위장(五衛將)·황해도관향사(黃海道管餉使)·안악군수·의주부윤 등을 역임하였고,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 때 황주수성대장(黃州守城大將)으로 도원수 장만(張晩)을 도와 공을 세워 진무공신(振武功臣) 3등으로 녹훈, 춘성군(春城君)으로 봉해졌다. 1626년(인조 4)에는 형조참판에 부총관을 겸하였고, 1632년 인목대비 상사(喪事)의 수릉관(守陵官)이 되었다. 나이 예순이 되었어도 능을 지키는 예법에 조금도 어김이 없으므로 주위 사람이 모두 탄복하였다고 한다. 그 뒤 호조참판, 형조판서겸지의금부도총관을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을 겪은 이듬해 소현세자(昭顯世子)가 볼모로 심양(瀋陽)으로 잡혀갈 때 우빈객으로 세자를 호위하였으며, 돌아와서는 춘성부원군에 봉해졌다. 1638년 대사헌이 되었고, 1646년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이 되어 민회빈 강씨(愍懷嬪 姜氏)[소현세자의 빈]의 사사(賜死)를 반대하여 사직하였다가 복귀하였다. 그러나 병 등을 이유로 사직서를 올렸는데 이에 대한 불윤비답(不允批答: 임금이 정승의 사직을 허락하지 않던 일) 문서 12장을 현재 후손 남대현이 보관하고 있다. 1648년(인조 26) 좌의정이 되었다.

[묘소]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성강리 남산소에 남이웅의 영정을 모신 남산영당이 있고, 그 뒷산에 묘소가 있다. 대형 봉분에 묘비가 있고, 문인석과 망주석이 배치되어 있으며, 부인 남평조씨(南平曺氏)가 합장되어 있다. 1658년(효종 9)에 세워진 묘비는 너비 55㎝, 높이 141㎝, 폭 19㎝의 호패형으로, ‘갈성분위진무공신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좌의정춘성부원군남공이웅지묘(竭誠奮威振武功臣大匡輔國崇綠大夫議政府左議政春城府院君南公以雄之墓)’라고 적혀 있다.

남이웅의 묘소는 명당으로 널리 알려져 있을뿐더러 인근 주민들 사이에는 질병이 났을 때 문인석에 기원하면 낳는다는 영험함이 전해져 오기도 한다.

[상훈과 추모]

남산소에 영정을 모신 남산영당이 있고, 마을 입구에 신도비가 서 있다. 지금의 신도비는 1977년에 새로 세운 것으로 너비 67㎝, 높이 192㎝, 폭 35㎝의 크기다. 원래의 비는 의정부좌참찬 조경(趙絅)이 지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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