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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1441
한자 佛像
영어의미역 Image of Buddha
분야 종교/불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집필자 곽동석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에 있는 불교 교리에 의한 예배의 대상을 시각적 조형 매체를 통하여 표현한 상.

[개설]

일반적으로 불상이란 부처의 상을 통칭하는 말이나 넓은 의미로는 불교와 관련되는 모든 상, 즉 부처의 상을 비롯하여 보살상(菩薩像)·천부신장상(天部神將像)·명왕상(明王像)·나한상(羅漢像) 등이 포함된다.

[삼국시대]

삼국시대 낙랑이 멸망하고 고구려의 국력 강성으로 인해 백제는 475년 한성에서 현재의 공주 지역인 웅진으로 수도를 옮기게 되었고 이때부터 공주 지역의 대가람들이 본격적으로 건립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공주 지역에서는 대통사(大通寺)를 비롯하여 서혈사(西穴寺), 남혈사(南穴寺), 동혈사(銅穴寺), 수원사(水原寺) 등의 사찰들이 건립되었다. 그러나 현재까지 당시의 불교 조각이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때까지만 해도 공주 지역에서는 불상과 같은 본격적인 불교미술품은 제작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74년 충청남도 공주군 의당면 송정리의 한 절터에서 출토된 백제금동보살입상은 국보 제24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재 국립공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공주의당금동보살입상으로도 불리며 높이 25㎝로 머리에 쓴 삼면보관(三面寶冠)에 화불(化佛)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관음보살임을 알 수 있다. 오른손에는 연봉오리를 들고 아래로 내린 왼손에는 정병을 들었으며, 두툼한 단판(單瓣) 연화대좌 위에 서 있다.

몸에 비해 큰 네모진 얼굴에 이목구비가 명료하고 두 뺨이 팽팽하여 원만한 보살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보발(寶髮)은 높은 보계로 묶은 다음 나머지는 두 갈래로 갈라져서 어깨 위로 늘어져 있다. 다소 부드러운 굴곡이 드러나 보이는 몸에는 천의와 긴 영락을 이중으로 걸쳤는데, 천의는 양 어깨를 넓게 덮고 몸 앞으로 늘어지면서 허리 아래에서 교차되고, 다시 양팔 위에 걸쳐서 몸 옆으로 길게 늘어지고 있다.

긴 영락은 굵은 띠 형태로 목걸이의 가운데와 배 부분에 둥근 장식이 있고, 몸의 뒷면에도 같은 형태의 영락이 보인다. 얼굴이 통통하며 몸과 양팔 사이가 뚫어져 있다든가 왼쪽 무릎을 약간 앞으로 내밀고 서 있는 자세 등에서 입체적인 표현이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굴곡 있는 양감이 적으며 자세도 약간 경직되어 있다. 조각 양식상 중후하고 당당한 느낌이 드는 7세기 전반 백제시대의 대표적인 금동보살상 중 하나로 비슷한 시기의 백제보살상인 부여 규암면 출토 금동관음보살입상과 비교된다.

한편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갑사 경내에 있는 석불(石佛)인 갑사 석조보살입상은 1976년 1월 8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51호로 지정되었으며, 갑사 진해당(振海堂) 안에 소장되어 있다. 원래 갑사 뒷산 사자암(獅子庵)에 갑사 부도, 약사여래입상과 함께 있었던 것을 옮겨온 것이라고 전해진다.

불상의 목 부분은 깨어진 상태이고 발밑에는 대좌(臺座)에 끼웠던 것으로 보이는 촉이 달려 있다. 보주형(寶珠形) 두광(頭光) 부분을 마애불처럼 붙여서 조각하였다. 머리는 결발(結髮)된 보발(寶髮)의 일부가 어깨까지 내려오고 목에는 굵은 목걸이가 있으며 중심에 있는 4개의 장식은 파손이 심하여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 가슴 부분의 오른손은 무엇을 들고 있는 것 같으나 분명하지 않고 왼손은 팔을 내려서 무릎 부분에서 목이 긴 보병(寶甁)을 잡고 있다.

천의(天衣)는 양 어깨를 지나 한 자락은 오른손 손목을 거쳐 뒤편으로 가 있는데 상체는 나신(裸身)이며 하체의 상의 각선이 유려하고 얇아서 불신(佛身)을 충실히 표현하고 있다. 얼굴은 파손되어 확연하지 않으나 코가 오뚝하고 눈은 감은 듯하며 입은 쫑긋이 다물고 있다. 전체적으로 잘록한 허리, 어깨 등 조각 수법이 세련된 감을 주고 있으며 백제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삼국시대 말기 조각 양식이 엿보이는 화강암 석조보살상의 드문 예이다.

[통일신라시대]

통일신라시대 공주 지역의 불상으로는 우선 조치원 서광암에서 발견되어 현재 국립공주박물관에 있는 계유명삼존천불비상과 공주시 정안면에서 발견되어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있는 삼존불비상을 들 수 있다.

이들 불상은 통일신라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불상이지만 양식적으로는 백제의 옛 양식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어 전환기의 문화 양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백제적인 조각 양식과 납석 계통의 석질 및 비석형 석상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어 흔히 연기파 비상(燕岐派碑像)으로도 불린다.

한편 금학동 사지에서 나온 석조광배는 높이 2m가 넘는 대형의 광배로 기본적으로 머릿광배와 몸광배를 함께 표현한 거신광배(擧身光背)의 전형적인 형식을 따랐다. 또한 공주 서혈사지(西穴寺址)에서 출토된 3구의 석불은 통일신라시대 후반기 불교 조각의 일반적인 흐름인 촉지인 좌상과 비로자나불의 유행 등을 보여주는 공주 지역의 대표적인 석불이다.

현재 국립공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이들 석불 가운데 2구는 8세기 중엽의 석굴암 본존불로 대표되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여래좌상이며 나머지는 지권인(智拳印)의 비로자나불좌상이다. 전체적으로 생동감이 사라지고 위축된 신체 조형과 불합리한 신체 비례, 입체감이 약한 옷주름 표현, 장식성이 강조된 대좌의 조형, 하대석에 나타난 초보적인 귀꽃의 형태, 상대석의 앙련 잎 속에 장식적인 꽃무늬가 아직 보이지 않는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 초의 전형적인 양식적 특징을 나타낸다.

이외에도 공주 서혈사지 석불과 비슷한 형식의 통견의(通肩衣)의 촉지인 여래좌상인 공주시 반죽동에서 출토된 석조여래좌상도 있다. 또한 공주 공산성에서 출토된 금동여래입상과 같은 소형의 금동불 역시 토착화의 과정을 보여주는 통일신라 말기 금동불의 전형적인 예이다.

경직된 얼굴 표정과 세장하면서도 괴체적인 신체 구조, 거의 편불화(片佛化)된 뒷면 구조, 7각으로 변한 대좌 형식 등으로 보아 이 금동불은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조선시대]

고려시대의 공주 지역 불상 제작은 토속적인 양식의 석불이 일부 조성되기도 하였지만 이전의 활력을 찾지 못하고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신흥리 사지 석불과 정치리 사지 석불편이 그 단적인 예이다.

이후의 공주 지역 불상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영은사 목조관음보살좌상과 갑사 소조삼세불(塑造三世佛)이다. 전자는 신체에 비해 큰 머리와 앞으로 숙인 듯한 자세, 사각형의 얼굴 형태 등에서 조선 후기인 17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후자는 공간적 개념의 석가모니·약사여래·아미타불 사이에 4구의 보살상을 배치한 형식 가운데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조각사적인 의의가 크다. 17세기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파괴적인 전쟁을 겪었고 그 이후 전국적으로 큰 불사가 일어나면서 국가적 염원을 담은 거대한 규모의 소조불들이 앞 다투어 조성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맥락에서 조성된 것이 바로 갑사 소조삼세불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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