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700549
한자 金海金氏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송두리지도보기·성석리지도보기|문백면 사양리지도보기·봉죽리지도보기|덕산면 산수리지도보기·합목리지도보기|초평면 용기리지도보기·용정리지도보기
집필자 강민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세거지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송두리·성석리|문백면 봉죽리·사양리
집성촌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송두리|문백면 사양리
입향시기/연도 조선 후기
성씨시조 김수로
입향시조 김우혁|김우광

[정의]

김수로를 시조로 하고, 김우혁·김우광 형제를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진천군 세거 성씨.

[연원]

김해김씨(金海金氏)는 가락계 김씨(金氏)의 종통(宗統)으로 가락국의 개조(開祖)인 김수로왕(金首露王)을 시조로 하고 있다. 이후 김해김씨의 파계는 김유신(金庾信)을 중시조로 하여 대소 146파로 분파되었는데, 그 중 김유신의 직계 종파는 고려시대 김목경(金牧卿)을 중조로 하는 김녕군파(金寧君派), 김익경(金益卿)을 중조로 하는 감무공파(監務公派), 김관(金管)을 중조로 하는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 등이 있다.

김해김씨는 신라의 왕실과 혼연을 맺음으로써 혈통의 순수성을 존중했던 신라에서 귀족으로 극진한 대우를 받았고, 고려시대에도 정승급 15명을 비롯하여 숱한 인물을 배출하여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서의 위세를 떨쳤다. 신라시대와 고려시대를 통해 그토록 번창했던 김해김씨는 조선조에 들어와서 겨우 상신 1명, 호당 1명, 공신 5명, 청백리 1명, 명장 1명, 문과 급제자 123명밖에 내지 못해 자못 침체한 느낌을 주는데, 이는 김일손(金馹孫)의 사초(史草)에서 야기된 무오사화의 영향이 지적되기도 하고 왕실이나 당대 다른 권문세족과 혼연을 맺지 않았던 점이 지적되기도 한다.

[입향경위]

김해김씨김유신의 부친 김서현(金舒玄)이 진천의 옛 이름인 만노군 태수로 부임하면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지리지 등에 보이지 않고 있다가 조선 영조 때 안경공(安敬公) 김영정(金永貞)의 7세손인 김우혁(金宇赫)·김우광(金宇桄) 형제가 진천군 문백면 사양리진천읍 송두리로 이주하면서 세거하기 시작하였다.

[현황]

『상산지(常山誌)』[1932]에 효자로 김사눌(金師訥)이 보인다. 2000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진천군 관내에 거주하는 김해김씨는 1,011가구 3,190명으로 나타났다. 김해김씨는 김영정의 13세손 김현구·김현린 형제가 고종진천군 덕산면 산수리에 내주한 이래 문백면 봉죽리진천읍 성석리에 산거하고 있으며, 문백면 사양리진천읍 송두리에 50여 호가 세거하고 있다.

[관련유적]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김유신의 영정을 봉안한 진천 길상사(吉祥祠)가 있다. 이보다 앞서 진천군 진천읍 교성리 41-1번지에는 김유신과 그의 아들 김삼광(金三光)을 배향한 서발한사당(舒發翰祠堂) 터가 있었다고 전한다. 진천군 진천읍 백곡면 갈월리김유신 장군과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킨 조감(趙感)을 배향하기 위한 사당 터가 있었으며, 만뢰사(萬賴祠)로 재건하여 배향하고 있다.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 18번지[김유신길 170-4]에 위치한 진천 김유신 탄생지와 태실은 사적 제414호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