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06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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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洪承憲 |
영어음역 | Hong Seungheon |
이칭/별칭 | 문일(文一),문원(汶園)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사양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전호수 |
성격 | 문신|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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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사양리 호암(虎巖)마을 |
성별 | 남 |
생년 | 1854년 |
몰년 | 1914년 |
본관 | 풍산(豐山) |
대표경력 | 궁내부특진관 |
[정의]
개항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문신이자 독립운동가.
[개설]
개항기 소론 양명학 계열의 문신으로 일제의 강점 이후에는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참여한 우국지사이다. 본관은 풍산(豐山). 자는 문일(文一), 호는 문원(文源). 정조 때 이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낸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의 5세 종손으로, 고조할아버지 홍낙원(洪樂源)과 증조할아버지 홍경모(洪敬謨)가 모두 이조판서를 역임하여 3대에 걸친 이조판서 집안으로 이름이 났다. 할아버지는 진천현감을 지낸 홍익주(洪翼周)이고, 아버지는 참판을 지낸 홍우명(洪祐命)이다. 할아버지가 진천현감을 지낸 것이 인연이 되어 홍승헌 가문은 문백면 사양리 호계(虎溪)마을에 정착하게 되었다.
[활동사항]
홍승헌(洪承憲)[1854~1914]은 지금의 진천군 문백면 사양리 호암(虎巖)마을에서 태어났다. 1875년(고종 12) 21세 때 경과(經科)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의 가주서·부정자를 거쳐, 1877년 예문관검열·사간원정언을 역임하였다. 1879년(고종 16) 사헌부교리·홍문관수찬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홍문관부교리·세자시강원필선·가례도감도청·병조참의·승정원동부승지를 거쳐 1884년(고종 21) 승정원우부승지에 올랐다.
1885년 전라도 함열로 정배령이 내려졌으나 출발하기 전에 사면되었다. 이후 승정원좌부승지·병조참지·이조참의 등을 거쳐 1890년(고종 27) 사간원대사간에 임명되었다. 뒤이어 공조참판·한성부우윤·이조참판·예조참판·병조참판 등을 거쳐 1893년(고종 30) 39세로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894년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친일내각을 세워 이른바 근대적 개혁을 추진해 나가자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기당(綺堂) 정원하(鄭元夏) 등과 연명으로 토역소(討逆疏)를 올려 일본 추종적인 개화 정책을 거부하고 강화도에 들어가 양명학을 바탕으로 한 자주적 개화 정책을 모색하였다. 1901년(고종 38) 궁내부특진관으로 관직에 복귀하였으며, 뒤이어 충청남도관찰사로서 충청남도 양전지계사업 감독을 겸임하였다. 49세인 1903년 다시 궁내부특진관에 임명되었으나, 국운이 점차 기울어져 가는 것을 보고 벼슬을 버린 뒤 고향인 진천의 호계로 내려왔다.
1910년 일제에 의해 주권을 빼앗기자 인척이자 양명학을 함께 공부한 경재(耕齋) 이건승(李建昇)·정원하 등과 함께 만주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망명지에서 이른바 신한촌(新韓村)을 구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운동을 진척시켜 나가다가 1914년 만주의 안동현(安東顯)에서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진천군 문백면 사양리 호암마을 뒷산에 있다.
홍승헌은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 이후 가학(家學)의 영향으로 양명학을 전수하였다. 특히, 정제두가 만년에 경기도 강화에 우거하면서 양명학을 강론하였으므로 ‘강화학(江華學)’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는데, 개항을 전후한 시기에는 서구 또는 일본 추종적인 근대화 정책을 거부하며 자주적인 근대화의 추진을 모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