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05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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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公轍 |
영어공식명칭 | Nam Gong-cheol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천화숙 |
[정의]
조선 후기 성남 지역 출신의 문신·문장가.
[개설]
남공철은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원평(元平), 호는 사영(思穎)·금릉(金陵)이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며, 14년간 재상을 역임하였다. 우의정·좌의정·영의정에 올랐고, 1833년 봉조하(奉朝賀)가 되었으며, 많은 금석문·비갈을 남긴 당대의 문장가이다.
[가계]
남한기(南漢記)의 손자이며, 대제학 남유용(南有容)의 아들이다. 모친은 김석태(金錫泰)의 딸이다.
[활동사항]
1780년(정조 4) 초시에 입격한 후, 1784년 부친이 정조의 사부(師傅)였던 관계로 음보(蔭補)[과거를 거치지 않고 조상의 공덕에 의해 벼슬을 받은 것]로 세마에 제수되었으며, 이어 산청과 임실의 현감을 지냈다. 1792년 친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고, 곧이어 홍문관부교리, 규장각직각에 임명되어 『규장전운(奎章全韻)』의 편찬에 참여하면서 정조의 지극한 우대를 받았다. 초계문신(抄啓文臣)에 선임되었으며, 김조순(金祖淳), 심상규(沈象奎)와 함께 패관문체를 일신하려는 정조의 문체반정에 동참했다.
정조 때에는 주로 대사성에 있으면서 후진교육 문제에 전념했다. 순조 즉위 뒤 『정조실록』 편찬에 참가했으며, 이조판서, 대제학을 역임했다. 1807년(순조 7)에는 동지정사로서 연경에 다녀왔고, 1817년에 우의정에 임명된 뒤 14년간이나 재상을 역임하였다.
[학문과 사상]
평소 김상임(金相任), 성대중(成大中), 이덕무(李德懋) 등과 친하게 지내면서 독서를 좋아했고, 경전의 뜻에 통달했다. 구양수(歐陽修)의 문장을 순정(淳正)한 법도라 하여 가장 존중했고, 많은 금석문·비갈을 남긴 당대 제일의 문장가였다.
[저술 및 작품]
순조, 익종의 『열성어제(列聖御製)』를 편수하였고, 저서로는 『고려명신전(高麗名臣傳)』이 있다. 시문집으로는 『귀은당집(歸恩堂集)』, 『금릉집(金陵集)』, 『영옹속고(穎翁續藁)』, 『영옹재속고(穎翁再續藁)』, 『영은문집(瀛隱文集)』 등이 있다.
[묘소]
남공철의 묘는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 청계산 자락에 남향하여 있으며, 위에 자리 잡은 어머니 안동김씨의 묘와 함께 2002년 12월 성남시 향토유적 제4호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1784년 아버지 남유용이 정조의 사부였던 관계로 음보로 세마(洗馬)를 제수 받았다. 1833년 영의정으로 치사해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