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0586 |
---|---|
한자 | 南漢山城聯合義陣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서승갑 |
[정의]
1896년 남한산성전투를 승리로 이끌기 위해 광주, 이천, 여주의 의병들이 결성한 연합의병진.
[조직]
의병진의 결성은 실학정신을 계승한 정신사적 토양에서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을미사변에 대한 충격, 단발령으로 대표되는 민족자존심에 대한 도전에 반발하려는 의지력으로 가속화되었다. 이런 관계로 전국 유림의 결단에 따라 직접무장투쟁을 독려한 전체적인 흐름에 호응하여 체계적인 의병부대를 조직할 수 있었다.
서울의 배후지역이며 군사적 중요성을 감안하면 남한산성은 광주, 이천 의병의 거점지로 부각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남한산성을 기반으로 항쟁한 대표적인 남한산성 연합의진은 경기도 연합의병진의 성격을 나타내는 이천수창의병진(利川首倡義兵陣)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의병진의 조직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한 인물은 김하락(金河洛), 구연영(具然英), 조성학(趙性學), 김태원(金泰元), 신용희(申龍熙) 등이다.
1896년 2월 이천의병진의 조성학, 김태원, 김귀성, 신용희 등은 백현(栢峴)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패퇴하면서 조직이 크게 와해되었고 의병의 재정비 과정에서 남한산성 연합의병진이 형성되었다. 김하락은 여주 심상희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구연영, 신용희, 전귀석(全貴錫), 김태원, 민승천을 불러들여 약 2,000명의 병사를 재모집하여 2월 23일 광주의병 심진원(沈鎭元) 등이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하고 남한산성에 입성하였다. 그러나 참령 장기렴(張基濂)이 8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반격하자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거듭되었다. 25일에는 의병장 김태원, 구연영 등이 광주군수 박기인(朴基仁)을 처단하고 여주의 심상희 의병진과 연합하는 한편 26일에는 소모군의 격문을 발송하면서 의병진을 강화하였다. 28일에 이천의병진과 연합하여 남한산성을 완전 점거하는 데 성공하였다.
[전개]
남한산성 연합의병진은 천혜의 요새지를 점령하고 풍부한 군수물자를 확보하자 서울진공작전을 추진하였다. 서울진공작전은 춘천, 분원, 공주, 청주, 수원 의병진과 연합하여 남한산성에 주둔한 관군과 일본군을 협공 격파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위협적인 형세는 일본과 집권층을 직접 자극하는 계기가 되어 남한산성을 두고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3월 5일 첫 전투에서 남한산성 연합의병진은 친위대의 침공을 격퇴하여 송파지역으로 내몰았고 대포 1문을 탈취하였다. 이어 정부측은 강화도 지방병을 지원하는 한편 남한산성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항복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남한산성 연합의병진은 이를 거부하고 완강히 저항하다 3월 20일 관군 및 일본군의 공격으로 인해 패퇴하고 말았다.
[의의]
남한산성 전투는 전기의병사의 대표적인 격전으로 의병 500여명과 관군 300여명이 사망하는 치열한 전투양상을 보여주었다. 남한산성 함락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지만 실제로 연합의병진은 보급로를 차단당해 타격을 일차적으로 받았을 것이다. 한편 의병장 박준영과 중군장 김귀성의 배신 등 의병지도부의 분열로 인해 의병들의 사기가 저하된 면도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척사위정사상을 관철시켜 국가의 자주권을 확보하려던 의지력은 이후 김하락, 구연영의 잔여 의병대가 영남지역으로 이동하여 지속적으로 항전하는 과정에서도 계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