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26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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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現代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상훈 |
[정의]
1945년 광복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경기도 성남 지역의 역사.
[개설]
1945년 광복 이후 미국과 소련의 분할 점령으로 인한 분단과 미군정, 한국전쟁, 자본주의의 발전, 민주화운동 등 급변하는 역사 속에서 성장과 발전을 거듭하여 이제는 통일 시대를 대비하고 있고, 성남 지역은 성남출장소, 성남시 승격, 분당신도시와 판교신도시 개발 등 급격한 도시화의 진행과 함께 첨단 산업·문화 도시로 발전을 지속하고 있다.
[행정구역]
1946년 3월 3일 광주군 중부면 내 단대리, 상대원리, 수진리, 복정리, 창곡리, 탄리 등 6개 리를 관할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광주군 중부면 성남출장소는 오늘날의 성남시의 모태가 된 성남시 지방 행정사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 1964년 광주군 조례 제68호에 따라 돌마면과 대왕면 9개 리, 낙생면의 3개 리와 합하여 광주군 직할 성남출장소로 승격되었고, 1971년 경기도 직할 성남출장소로 승격되었으며(경기도 조례 제47호), 마침내 1973년 성남시의 탄생에 이르렀다(법률 제2597호).
[해방 정국]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중앙의 미군정 성립과 함께 광주군은 11월 2일 입성한 제68군정중대가 관할하였다. 광주 지역은 서울과 인접해 있어 해방 후 실질적 지방 행정을 담당해온 인민위원회 체제가 다른 지방보다 일찍 붕괴되었다.
1948년 5월 10일에 치러진 제헌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는데 성남 지역이 속해 있는 광주군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의 신익희가 단독 입후보하여 무투표 당선 되었고, 7월 20일 이승만이 대통령에 선출되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공식 출범함에 따라 미군정은 막을 내렸다.
[6·25 전쟁]
6·25전쟁 이 일어나고, 7월 4일 광주군은 북한 인민군에게 점령되어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고, 북한의 전시 동원 정책에 따라 의용군 모집과 원호 사업이 이루어졌다. 유엔과 중국군의 참전으로 수복과 재 후퇴를 반복한 후 1951년 2월 26일에서야 경찰대를 필두로 행정, 치안 관서가 광주군에 들어올 수 있었다.
[1960~1970년대]
1960년의 4월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성남 지역의 4개면에서도 12월 19일과 26일 시의회 의원 선거와 면장 선거가 실시되어 돌마면에는 홍순석, 낙생면에는 이하림, 대왕면에는 이학종, 중부면에는 김종구가 각각 면장으로 당선되었다. 하지만 1961년 5·16 군사 쿠테타로 인한 헌정 중단 사태로 말미암아 4개월의 단명 임기로 끝나고 말았으며, 동년 9월 1일 군사혁명위원회에서는 읍이나 면은 제외한 채 군을 기초자치단체로 하고, 지방자치단체의 장을 임명제로 변환하였다.
1963년 대왕면의 세곡리, 율현리, 일원리, 수서리, 자곡리 5개 마을이 1963년 1월 1일로 서울특별시 성동구로 편입되었다. 나머지 4개 면의 관할 마을은 오늘날의 성남시 관할 지역에 있었다.
1968년 주택단지경영사업 인가로 서울시 무허가 건물 일소에 따른 철거민정착주택단지로 현재의 태평동, 수진동, 단대동, 은행동, 금광동, 상대원동 등이 서울시의 불량 무허가 난민 55만명에 대한 1차적인 이주 지역으로 정해졌다. 이와 함께 개발은 서울시에서, 일반 행정은 경기도에서 관장하는 이원 행정 체제가 되었으며, 1969년에는 주택단지조성작업이 채 이루어지지 않은 가운데 철거민이 이송되어 가수용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1970년 9월 19일 경기도와 서울시의 행정 협약이 체결되어 이원 행정으로 빚어지는 혼란을 수습하였으나 1971년 8월 10일에는 서울시의 전매입주자에 대한 시가 일시불 토지 불하 방침과 경기도의 가옥 취득세 부과 조치 때문에 이것을 시정하도록 요구하고 나선 입주민들의 소요 사태를 이룬 8.10 광주대단지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때문에 급팽창하는 도시 규모와 주민에 적응하는 행정 체제를 갖추기 위하여 1971년 9월 13일 경기도 성남출장소가 설치되어 원래의 중부면 6개리와 대왕면, 낙생면, 돌마면을 합하여 128.5㎢를 관할하게 되었다. 성남 지역은 1973년 7월 1일 독립 시로 승격되어 서울시의 철거난민 입주 인가를 받은 날로부터 5년 3개월 만에 전국 36개시 가운데 11위의 인구 수 20만의 도시가 되었다.
시제 실시 이듬해인 1974년 시립묘지 설치와 충혼탑 건립, 1975년 희망대공원 조성과 공설운동장[현 성남종합운동장] 건설, 대원지구 개발 사업이 시작되었다. 1976년에는 한강 취수로 상수도 문제 해결과 서울과의 교통 체증 해소됨으로써 시민들의 일상 생활에는 큰 향상을 가져왔지만, 그 반면에 강력한 인구증가 억제 조치와 건축 제한 조치가 취해짐으로써 대국적인 견지에서의 도시 발전에는 큰 위축을 가져왔다. 1977년에는 인도 포장, 가로수 조성, 불량 지구의 개량과 뒷골목 정비 등 도시 기반 전반에 걸친 정비 작업이 시작되었다. 1978년에는 대봉로[현 수정로] 복개 공사 시작, 1979년 시민회관 건립 공사 착공 및 체육 문화진흥 기금 조성을 위한 새마을체육금고가 설치되었다.
[1980~2000년대]
1980년대 성남시는 인구 40만의 도시로 성장하였으며,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 대회 등을 통해 서울비행장(공군성남기지)과 성남종합운동장 주변을 비롯한 주거 환경 정비 사업이 지속적으로 진행되었으며, 1987년 6월 항쟁과 1989년 노동자 시위가 이어지면서 시민들의 민주 의식도 크게 성장하게 되었다. 1989년 5월 1일 성남시 조례 제931호에 의해 구제가 실시되면서 수정구와 중원구를 설치하였으며, 분당 지역 일원에 5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신도시 건설 계획이 발표되었다.
1990년대 성남시는 지방선거 실시와 분당 신도시 건설로 대표할 수 있다. 1987년 6월 민주 항쟁의 성과인 지방의회 의원선거가 1991년 3월 26일에 실시되었는데 시의원 45명을 선출하여 동년 4월 15일 성남시의회 원 구성을 하였으며, 같은 해 6월 20일에는 전국 도의회 의원 선거가 실시되어 성남시에서는 6개 선거구에 6명의 도의원을 선출하였다. 그리고 1995년에는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통해 오성수가 민선 초대 시장으로 당선되었다.
1989년 4월 성남 분당지구 신도시 건설 계획이 발표됨에 따라 1991년 7월 1일 분당출장소를 설치하였고, 2개월 뒤에 분당구로 승격하여 개청되었고, 관할 지역은 과거 돌마면의 분당, 서현, 수내, 정자, 이매, 야탑, 도촌, 여수, 율동의 9개 동과 낙생면의 구미, 백현, 동원, 금곡, 삼평, 궁내동의 6개 동, 대왕면의 사송동 등 모두 16개 동이었다. 분당신도시는 쾌적한 주거 환경과 더불어 판교-구리간 고속도로, 지하철 분당선[현 수인분당선]과 지하철 8호선이 개통으로 조성된 편리한 교통 환경은 수도권 신도시 중 가장 만족도가 높은 지역이 되었고, 성남시는 인구 90만이 넘는 대도시로 진입하게 되었다.
2000년대 성남시는 판교신도시 건설과 수정·중원 지역의 재개발로 또 한 번의 변화와 발전의 단계에 들어선다. 2001년 판교 지역이 택지개발예정지구로 지정되고, 2003년 12월 26일 판교신도시 개발 계획이 승인되어 성남시 분당구 삼평, 판교, 백현, 운중, 이매, 야탑, 서현, 수내동 등과 수정구 금토동 일원 93,760,000㎡에 수용 인구 89,000명(29,700세대)과 판교테크노밸리 등 산업 기반 시설 조성을 계획으로 건설이 시작되어 2009년 12월 준공하였다. 1970년대 무계획적으로 조성되어 교통, 문화, 주거 시설 등 생활 환경이 낙후된 수정구와 중원구 지역에 대한 재개발 추진으로 도촌동에 이주단지를 조성하고, 공원로 확장 공사 등과 함께 단대동과 중앙동 일부 지역을 1단계로 재개발을 진행하고 있으며, 은행2동, 신흥2동 등 2단계 재개발을 추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