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03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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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鹽盆 |
영어공식명칭 | Saltpan |
이칭/별칭 | 염부(鹽釜),염조(鹽竈)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
시대 | 고려,조선 |
집필자 | 방문식 |
[정의]
경기도 시흥 지역에서 소금을 생산하기 위해 설치한 가마 모양의 솥.
[개설]
염분(鹽盆)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굽기 위해 설치한 소금가마[鹽釜]를 말한다. 또한 염분은 염전(鹽田)이나 소금 제조량[鹽製造]의 한 단위, 다른 뜻으로는 염분에서 소금을 징수하는 권익을 가리키기도 한다. 소금은 식료품의 하나로 인간의 생리 작용에서 필수적인 물질이며 대체 식품이 없기 때문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소금은 산지나 생산 방식에 따라 해염(海鹽), 암염(岩鹽), 정염(井鹽), 지염(池鹽), 토염(土鹽) 등으로 나눈다. 세계 소금 생산의 2/3는 암염을 자원으로 하고 있으나, 우리나라는 지형과 지질학적 특성상 전통적으로 바다에서 소금을 얻어 왔다.
[소금 제조 방법]
과거 바다에서 소금을 얻는 방식으로는 해수직자법(海水直煮法), 염전식 제염법(鹽田式製鹽法) 등이 있었다. 해수직자법은 바닷물을 솥에 부어 끓여서 소금을 만드는 방식으로 일찍부터 행해지던 원시적인 방법이다. 염전식 제염법은 제방의 유무에 따라 무제염전(無堤鹽田)과 유제염전(有堤鹽田)으로 나뉘는데, 증발을 반복해 농도 짙은 짠물을 졸이다가 끓여서 소금을 얻는 방식은 둘 다 유사하다. 이러한 제염법은 많은 땔감과 노동력을 필요로 하였다. 그래서 소재를 쉽게 구할 수 있는 바닷가에 염분과 염정(鹽井) 등을 설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소금 생산 방식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함경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염전식 제염법을 사용하였다. 구체적으로 무제염전식 제염법은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한 서해안의 평안도·경기도·충청도와 전라도 북부 지방, 그리고 유제염전식 제염법은 전라도 남부와 경상도 등 남해안의 대부분 지역에서 행해졌다.
[소금 관련 기록과 흔적]
소금 생산과 관련된 기록을 살펴보면 고대시대부터 언급되기 시작한다. 즉, 『삼국사기』에 소금을 만드는 노예[鹽奴]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미천한 신분의 사람이 소금을 생산하고 운반하는 일을 도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염분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고려 초의 「태안사적인선사조륜청정탑비(太安寺寂忍禪師照輪淸淨塔碑)」 끝부분에 ‘두원지(荳原地) 염분 43결(結)[약 0.43㎢]’이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소금은 국가의 중요한 세금원이었기 때문에 소금을 생산하는 솥의 크기와 무게에 따라 등급을 나누고 관리한 기록이 보인다. 『경국대전』에서 염세(鹽稅)는 각 도(道)의 염분을 여러 등급으로 나누어 대장을 작성하였다. 염분은 솥의 크기와 무게에 따라 대부(大釜), 중부(中釜), 소부(小釜) 등으로 나뉘었다. 조선시대에는 길이·너비·둘레가 7파(把)[약 10.8㎡]이면 대부, 4파[약 6.2㎡]이면 중부, 2파[약 3.1㎡]이면 소부였다. 무게는 10냥(兩)[375g]이면 대부, 7냥[262.5g]이면 중부, 4냥[150g]이면 소부, 2냥[75g]이면 소소부(小小釜), 1냥[37.5g]이면 협부(狹釜) 등으로 구분하였다. 또한 솥의 재질에 따라 철분(鐵盆), 토분(土盆) 등으로 구분하기도 하였다.
이 같은 염분의 상세한 구분은 염세가 국가의 중요한 재원이었던 까닭인데, 토지의 후박(厚薄)과 시초(柴草)의 많고 적음, 장시(場市)의 멀고 가까움까지도 세금을 매기는 기준이 되었다. 이렇게 구분된 대장은 호조와 본도(本道) 및 본읍(本邑)에 비치하고, 염분이 멀리 떨어져 있는 고을에는 염창(鹽倉)을 설치하여 생산된 소금을 저장하게 하였다. 저장한 소금은 곡물이나 직물과 바꾸어서 군자(軍資)에 보충하였다. 경기도·충청도·황해도에서 세금으로 납부하는 소금은 사재감(司宰監)에 먼저 상납하고, 남는 것을 군자감(軍資監)과 염창에 나누어 수송하도록 규정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고려시대에 비하여 염전의 수가 비약적으로 증가하고, 시흥을 중심으로 한 인천 지역에서는 소금의 제조가 왕성하였다. 고려시대의 경제 상황을 기록한 『고려사』 식화지(食貨志)에 의하면, 고려 후기의 염분 수가 전국에 616곳이 있었다. 조선 전기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전국의 염분 수가 1,362곳, 염소(鹽所) 수가 264곳, 총 1,626곳으로 고려 후기에 비하여 2.5배 정도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
경기도는 염분이 1곳이고, 염소가 88곳이었는데, 남양이 염소 44곳으로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다음으로 강화 11곳, 부평 7곳, 인천 6곳, 수원 6곳, 안산 5곳이었다. 말하자면 시흥을 중심으로 한 인천 지역에서 소금의 제조가 왕성하였으며 자연도, 용류도, 사탄도 등에는 소금을 전문적으로 제조하는 염부(鹽夫)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 후 80년이 지나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인천의 물산으로 소금을 적고 있었다. 시흥을 중심으로 한 인천과 남양 등지는 조수 간만의 차가 크고 염전식 제염법으로 소금을 얻기 쉬워 소금 생산지인 염소가 존재하였던 대표적인 지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