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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402
한자 雙樹驛
이칭/별칭 상수역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고려/고려,조선/조선
집필자 정학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폐지 시기/일시 1894년연표보기 - 쌍수역, 갑오개혁으로 폐지
쌍수역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전읍 내곡리

[정의]

조선 시대 경기도 양주에 속했던 남양주시 진전읍 내곡리에 있던 교통·통신 기관.

[개설]

역(驛)은 고대 이래 중앙 정부와 지방간의 효율적인 연결망을 구축하기 위해 육로(陸路)에 설치한 교통·통신 조직의 일종으로 역참(驛站)이라고도 하였다. 쌍수역(雙樹驛)은 고려 시대에는 상수역(桑樹驛)으로 불렸으며 춘주도(春州道)의 역 가운데 양주 관내 풍양현에 속해 있으면서 양주[남경]에서 포천·가평 방면을 연결하였고, 조선 시대에는 평구도(平丘道) 관할의 역 가운데 하나로서 한양에서 가평·포천 방면을 연결하는 소로역(小路驛)이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쌍수역은 다른 지역의 역들과 마찬가지로 국가가 지방 통치를 위한 정령(政令)의 전달과 관리의 왕래, 외교 사행의 영송(迎送), 군사의 왕래 등 국가의 공적 행위가 원활히 수행되도록 하는 교통·통신 기구 역할을 하였다.

[관련 기록]

『세종실록(世宗實錄)』[9권, 2년 8월 12일]에 형조에서 여러 역의 전운(轉運)하는 노비에 대해 계(啓)하기를, “경기(京畿)의 양재(良才)·낙생(樂生)·구흥(駒興)·영서(迎曙)·벽제(碧蹄)·마산(馬山)·동파(東坡)·초현(招賢)·청교(靑郊) 등 9역에는 각 역에 10호(戶)를 주는데, 정역(正役)이 한 명이요, 봉족(奉足)이 두 명이니, 합계 270명인데, 쌍수역만은 12호요.”라고 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경기 양주도호부]에는 “역이 6이니, 청파(靑坡)·노원(蘆原)·영서·평구(平丘)·구곡(仇谷)·쌍수이다”라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경기 양주목 역원]에는 “평구역은 주 동쪽 70리 지점에 있어 본도의 속역 열한 곳을 찰방(察訪)하는데, 녹양(綠揚)·안기(安奇)·양문(梁文)·봉안(奉安)·오빈(娛賓)·쌍수·전곡(田谷)·백동(白冬)·구곡·감천(甘泉)·연동(連洞) 등이다. …… 쌍수역은 풍양현 남쪽 2리 지점에 있다”라고 하였다. 『여지도서(輿地圖書)』[경기도 양주목 역원 부발참(附撥站)]에는 “쌍수역별비곡면(別非谷面)에 있는데 동쪽으로 40리 떨어져 있고 관북간로(關北間路)의 평구도 소속으로 말 8필, 이속과 남자 종이 48명, 여자 종이 3명”이라고 전한다.

[변천]

1457년(세조 3)에 이조의 건의로 각 도 역의 관할을 조정하고 정역찰방(程驛察訪)을 두게 하였는데, 이때 쌍수역구곡역(仇谷驛) 등과 함께 경기·강원도 정역찰방 관할이 되었다. 관북(關北)[함경도] 지방과 통하는 작은 길[間路]에 있었던 쌍수역에는 18세기 중반에 편찬된 『여지도서』에 따르면 말 8필, 이속과 남자 종이 48명, 여자 종이 3명이 속해 있었다.

역 내지 역참은 조선 후기에 들어 역마(驛馬)를 함부로 이용한다든가 역전(驛田)의 사유화 등으로 인한 폐단이 가중되어 그 기능이 마비 상태에 놓이게 되자, 명나라의 예에 따라 파발(擺撥)을 설치, 이와 병행하여 운영되었다. 양주의 평구역을 중심으로 한 평구도와 그 소속의 쌍수역은 다른 지역의 역들과 마찬가지로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까지 존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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