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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한국사 속에서 전개된 경기도 양주 지역의 역사. 역사는 기본적으로 사회 구조와 계층, 생산력 등을 바탕으로 시대 구분을 하며 그에 따라 고대나 중세, 근세, 근대, 현대 등의 구분을 하기 마련이다. 시대 구분을 할 때에는 기본적으로 시대의 전환점, 즉 언제부터 언제까지인가를 제시할 필요가 있게 된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한국사에서 특히 남한 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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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 7일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미군이 경기도 양주를 포함하여 남한을 통치한 시기.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항복하면서 한반도는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미국과 소련에 의해 남북이 분할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38도선 이남에 대해서는 태평양 미육군총사령부 총사령관 맥아더가 1945년 9월 7일 ‘조선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사령부 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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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경기도 양주 지역을 포함한 한반도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 6·25 전쟁은 1948년 남북한에 이념이 다른 정권이 들어서고 양측에 대한 우방국의 지원이 갈라지게 되자 정치적 긴장감이 높아지면서 북한군의 남침으로 벌어진 전쟁이다. 전쟁은 1953년 7월 23일 당시까지의 전선을 군사 분계선으로 정하고 포로 자유 송환을 골자로 하는 휴전 협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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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경기도 양주를 포함한 전국에서 실시된 범국민적 지역 사회 개발 운동. 새마을 운동은 1970년 4월 22일 박정희 대통령의 제창으로 행해진 지역 사회 개발 운동으로, 근면·자조·협동을 기본 정신으로 하고 그 실천을 범국민적·범국가적으로 추진하여 총체적인 국가 발전을 추진하기 위해 진행되었다. 서울에서 가까운 양주 지역은 시범 실시 지역으로 선정되었고, 많은 예산이 투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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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부터 1980년까지 경기도 양주 지역에 설치되었던 행정 구역. 수동면(水洞面)은 예로부터 산세가 수려하고 맑은 물이 굽이쳐 흘러 물골안이라고 하였으며, ‘수동’은 이 물골안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측된다. 수동면은 1963년 1월 1일 양주군에 신설된 면으로, 가평군 외서면 입석리·외방리·내방리의 3개 리와 양주군 진접면의 수산리 및 양주군 화도면의 지둔리·운수리·송천리를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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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부터 1942년까지 경기도 양주 지역에 설치되었던 행정 구역. 1922년 10월 1일 양주군의 청사를 당시 주내면 유양리에서 시둔면 의정부리로 이전하면서 시둔면은 양주군의 중심지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군청사가 위치한 시둔면을 양주면(楊州面)으로 변경하게 되었다. 삼한 시대 진한에 속하던 지역으로 475년 고구려 매성현에 속하였다가 757년 통일 신라 내소군에 속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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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부터 2003년까지 경기도 양주 지역에 설치되었던 행정 구역. 양주읍이란 명칭은 옛 양주의 읍치가 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 시대에는 양주목의 중심지로서, 동헌·사직단·여단[돌림병 예방을 위해 나라에서 외로운 혼령을 제사지내주던 제단]·객사 등 주요 시설이 밀집되어 있었다. 삼한 시대 마한에 속하던 지역으로 475년 고구려 매성현에 속하였다가, 757년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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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부터 2003년까지 경기도 양주 지역에 설치되었던 행정 구역. 회천읍(檜泉邑)은 회천면에서 왔으며, 회천면은 천천면·어등산면·회암면 등이 합쳐질 때 회암면의 ‘회(檜)’자와 천천면의 ‘천(泉)’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삼한 시대 마한에 속하던 지역으로 475년 고구려 매성현에 속하였다가 757년 통일 신라 내소군에 속하게 되었다. 940년 고려 견주에 속하였다가 98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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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6월 좌익 전향자로 구성된 조직인 국민보도연맹 산하 경기도 양주 지역 지부. 국민보도연맹은 대한민국 정부의 절대 지지와 북한 공산 괴뢰 정권의 절대 반대 및 타도, 공산주의 사상의 분쇄, 남북 노동당의 멸족 파괴, 정책 폭로 및 분쇄, 민족 세력의 총결집 등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정식 명칭은 ‘국민보도연맹’이었으나 통상 ‘보도연맹’으로 불렸다. 1948년 8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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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당시 경기도 양주 지역에서 활동한 우익 계열의 자경 단체. 1948년 남북한에 이념이 다른 정권이 들어서면서 양측 간에 정치적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이어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 전쟁이 1953년 7월 23일 휴전 협정 조인에 이르기까지 3년이 넘게 지속되었다. 이 기간 중 한국 사회 내에서는 치열한 이념 대립과 함께 빨치산 활동이 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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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12월 경기도 양주 지역에서 결성된 대한청년단 산하 우익 청년 단체. 대한청년단은 1949년 12월 19일 이승만(李承晩)이 자신의 취약한 정치 기반과 반공 활동을 강화할 목적으로 전국에 산재해 있던 청년 단체를 하나로 모아 결성한 단체이다. 이승만을 총재로 하여 장택상(張澤相)·지청천(池靑天)·유진산(柳珍山)·신성모(申性模) 등이 최고 위원으로 추대되었으며, 단원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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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0월 경기도 양주 지역에 설립된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양주 지회. 독립촉성중앙협의회는 1945년 10월 당시 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李承晩)을 중심으로 조국의 자주독립을 촉진하기 위해 정당 통일 운동 차원에서 조직된 협의체였다. 좌익·우익 50여 정당과 200여 개에 이르는 사회단체 대표 등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승만이 총재로 추대되었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양주지회는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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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 경기도 양주 지역에 설립된 민간 자치 기구. 인민위원회는 해방 직후 설립된 건국준비위원회가 미군의 진주 직전 조선인민공화국으로 개편되자 1945년 11월까지 건국준비위원회 지방 조직들과 자생적 조직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인민위원회는 미군정의 통치 기구가 자리 잡을 때까지 민간 자치 활동을 전개하였다. 양주 지역에서는 양주군 인민위원회가 그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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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 직후 재결성된 조선공산당의 경기도 양주 지역 지구당. 조선공산당은 1925년 서울에서 결성되었으나 일제에 의해 몇 차례 와해되는 등 굴곡을 겪었다. 그러다 국내 사회주의자들 중 경성콤그룹 세력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이 전개되어 1945년 9월 11일 다시 결성되었으며 여운형(呂運亨), 박헌영(朴憲永), 허헌(許憲), 김원봉(金元鳳) 등이 의장단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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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기간 중 경기도 양주 지역에서 빨치산 등에 의해 벌어진 양민 학살 사건. 1948년 남북한에 이념이 다른 정권이 들어서고 양측에 대한 우방국의 지원이 갈라지게 되자 정치적 긴장감이 높아지게 되고, 결국 북한군이 남침함으로써 6·25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6·25 전쟁 기간 중 양주는 북한군 점령 하에 들어가기도 하였는데, 북한군은 양주 지구에서 반공 인사들을 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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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6월 13일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효촌리에서 주한 미군 장갑차에 의해 여중생 두 명이 압사당한 사건. 6·25 전쟁이 종료되고 남북한 간 휴전 협정이 체결되자 주한 미군은 1958년 2개 사단만 남기고 점차 철수를 시작하였다. 1953년 10월 1일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한·미 동맹이 강화되었고, 미군은 휴전 상태인 정전 체제를 관리하기 위해 한국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