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1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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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奎相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정윤미 |
[정의]
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영암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박규상(朴奎相)[1893~1921]은 1919년 경성 약학 전문학교에 다니던 중 3·1 운동에 참여하였고, 이후 고향인 영암에서 독립 만세 시위운동을 펼치다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활동 사항]
박규상은 1919년 3·1 운동 당시 경성 약학 전문학교생(京城藥學專門學校生)으로 서울에서 독립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갈 때 「독립 선언문(獨立宣言文)」과 태극기 등을 가지고 가서 주민들의 독립 의식을 고취하였다. 활동 당시 박규상의 본적은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서구림리(西鳩林里) 391번지였다.
독립 만세 운동의 열기가 전국적으로 불타오르던 시기 영암에서는 1919년 3월 11일에 조극환(曺克煥)이 주동이 되어 보통학교 학생과 주민들을 모아 독립 만세 시위를 일으켰다. 그러나 일본 군경에게 미리 탐지되어 감시가 강화되었고, 그로 인해 산발적인 독립 만세 시위가 일어나더라도 일제의 무력 탄압으로 곧 중단되는 상황이었다.
박규상은 이러한 영암 지역의 상황을 타개하고자 최한오(崔漢五)·조병식(曺秉植) 등과 함께 대규모 독립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뜻을 모으고, 읍내의 유지 조극환·정학순(鄭鶴順)·최민섭(崔旻燮) 등과 연락을 취하면서 영암 장날인 4월 10일 오전 9시를 기하여 구림리와 읍내에서 동시에 독립 만세 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박규상 등은 구림리의 문죽정(問竹亭)을 임시 연락 본부로 정하고, 당시 영암 보통학교 학생이었던 김봉근(金奉根)·김영언(金永彦)·유인봉(柳寅奉)·이종구(李鍾謳)·이지봉(李枝奉)·천병권(千秉權)·진봉재(陳奉才)·박종련(朴鍾連)·채동팔(蔡東八) 등으로 하여금 당시 군서면 면서기 김재홍(金在洪)과 최민섭이 면사무소에서 몰래 등사한 태극기 50여 매, 「독립 선언문」 600여 매, 『독립 신문(獨立新聞)』 500여 매, 「독립가(獨立歌)」 100여 매를 배포케 하였다.
1919년 4월 10일 오전 9시, 박규상은 회사정(會社亭) 광장에 모인 시위 군중에게 태극기와 유인물을 나누어 주며 시위 군중의 선두로 나아가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어 1천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 군중과 함께 읍내 중심가로 행진하다가 체포되었다. 박규상은 그해 6월 27일 대구 복심 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르다가, 심한 병고로 보석되어 귀향하던 중 서호강(西湖江)의 배 안에서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박규상의 공훈을 기려 1980년에 대통령 표창을, 1991년에 건국 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