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7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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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懶翁 |
영어공식명칭 | Naong |
이칭/별칭 | 혜근(慧勤),혜근(惠勤),강월헌,선각,보제존자 |
분야 | 종교/불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배상현 |
출생 시기/일시 | 1320년 - 나옹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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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서품 시기/일시 | 1339년 - 나옹 출가 |
활동 시기/일시 | 1355년 - 나옹, 광제선사 주지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371년 - 나옹, 왕사 피봉 |
활동 시기/일시 | 1376년 - 나옹, 양주 회암사 중창 |
몰년 시기/일시 | 1376년 - 나옹 사망 |
출생지 | 경상도 영해부 - 경상북도 영해군 |
활동지 | 회암사 -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
성격 | 승려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왕사 |
[정의]
고려 후기 경상북도 영덕 출신의 승려.
[개설]
나옹(懶翁)[1320~1376]의 속명은 아원혜(牙元惠), 법명은 혜근(慧勤, 惠勤), 법호는 보제존자(普濟尊者), 호는 강월헌(江月軒)·선각(禪覺)이다. 나옹도 호 가운데 하나이다. 고려 후기의 선승으로 20세에 출가하였으며, 천보산 회암사에서 4년간의 수도 끝에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 28세에 원나라[1271년에 몽고 제국의 제5대 황제 쿠빌라이가 대도(大都)에 도읍하고 세운 나라]에 유학해 인도 승려 지공(指空)을 스승으로 삼아 지공의 선풍을 이어받았으며, 명성이 원나라 황제에게까지 알려져 광제선사(廣濟禪寺)에 주석해 개당 법회에서 설법하였다. 귀국 후 공민왕의 왕사(王師)로 활약하였으며, 1376년 양주 회암사(檜巖寺)를 중창해 낙성하고 여주 신륵사(神勒寺)에서 열반하였다.
[활동 사항]
나옹은 1320년(충숙왕 7) 영해부(寧海府)에서 아버지 아서구(牙瑞具)와 어머니 정씨(鄭氏) 부인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20세에 친구의 죽음을 보고 공덕산(功德山) 묘적암(妙寂庵) 요연선사(了然禪師)에게 가서 출가하였다. 25세에 경기도 양주 천보산 회암사에 들어가 크게 깨달음을 얻었으며, 28세에 원나라 연경(燕京) 법원사(法源寺)에서 지공화상(指空和尙)을 만나 법을 배웠다. 31세 되던 해 3월 통주(通州) 휴휴암(休休庵)에서 하안거를, 8월에는 정자선사(淨慈禪寺)에서 평산선사(平山禪師)와 선문답을 나누었다. 32세에 명주(明州) 보타낙가산(補陀洛迦山)으로 가서 관음보살을 친견하였으며, 육왕사(育王寺)에서 석가상에 예배하였다. 36세에 도행(道行)이 널리 알려져 원황제는 나옹을 광제선사의 주지로 임명하였고, 나옹이 37세 되던 해 개당법회(開堂法會)를 여니 금란가사를 하사하였다. 38세에 광제선사를 떠나 법원사로 돌아왔으며, 39세에 지공의 안내로 귀국해 오대산 상두암(象頭庵)에 머물렀다. 42세에 공민왕은 도성 안으로 나옹을 맞이하고 만수가사(滿繡袈裟)와 수정불자를 내렸으며 신광사에 머물기를 청하였다. 46세에 용문·원적 등 여러 산을 순유하였고 47세에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52세 되던 해 8월 왕사에 피봉되었고 송광사에 가서 머물렀다. 53세에 회암사 북쪽에 지공의 사리와 영골을 봉안하였으며, 54세부터 회암사 중창 불사를 시작하여 57세 되던 봄에 낙성하였다. 회암사에서 문수회(文殊會)를 개최하니 남녀가 귀천을 불문하고 구름같이 모여들어 절문을 가득 메웠다. 왕에게 청하여 밀양 영원사(塋源寺)를 하산소(下山所)로 삼았으나 도중에 경기도 여주 신륵사에서 세수 57세, 법랍 37세로 사망하였다.
[사상과 저술]
나옹은 저서로는 『나옹화상어록(懶翁和尙語錄)』과 『나옹화상가송(懶翁和尙歌頌)』이 전한다. 두 책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묘소]
양주 회암사지에 나옹선사 부도 및 석등[경기도 유형문화재]이 있다.
[상훈과 추모]
사후 선각(禪覺)이라는 시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