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13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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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懶翁禪師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배상현 |
[정의]
경상북도 영덕군 출신의 고려 말 선승 나옹 혜근의 삶에 관한 이야기.
[개설]
"청산은 나를 보고 말 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사랑도 벗어 놓고 미움도 벗어 놓고/ 물 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누구나 한 번은 들어보았을 만한 시, 그러나 이 시의 작자가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는 않다. 다만, 예전부터 고려 말 고승 나옹(懶翁)[혜근(慧勤), 1320~1376]의 시로 널리 회자 되고 있을 뿐이다. 이는 시대를 뛰어 넘어 사람들의 의식 속에 나옹이 얼마나 친숙한 인물인지를 알게 해준다. 고려 말 불교계는 사원이 대규모의 토지와 노비를 불법적으로 소유해 국가의 공적인 경제를 잠식하고 있었고, 정치 세력과 연계되어 종파 간의 갈등과 대규모 불사(佛事) 등으로 성리학을 기반으로 새롭게 성장하던 지식인들이 불교를 배척하는 명분을 제공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나옹은 선풍(禪風)을 진작하며 불교계에 큰 자취를 남긴 인물이었다.
[출생지 영덕에 전해오는 이야기들]
나옹은 금빛 새매의 태몽으로 잉태되어, 1320년 오늘날의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선관서령(膳官署令)을 역임한 아서구(牙瑞具)였고, 모친은 창녕정씨(昌寧鄭氏)였다. 나옹의 출생지에는 관련된 여러 이야기가 전해온다. 신기리 반송정 동북쪽 절벽 밑에 있는 큰 웅덩이[소(沼)]는 그런 현장 가운데 하나이다. 어머니 정씨는 이곳에서 나옹을 낳았다고 한다. 나옹이 태어날 당시 고려는 원(元)의 간섭기로, 정해진 삼세(三稅) 외에도 과렴(科斂) 등으로 민인들의 처지는 아사 직전이었다. 아버지 아씨(牙氏)는 세리(稅吏)의 횡포를 견디다 못해 도망 중에 있었다. 어머니는 만삭이 된 몸을 이끌고 남편을 대신해 예주부(禮州府) 동헌으로 잡혀 가던 중에 나옹을 낳게 되었다. 다행히 상황을 파악한 부사에 의해 풀려나게 된 부인이 아이를 낳았던 곳에 돌아와 보니, 수십 마리의 까치들이 날개를 펴고 갓난아이를 보호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은 ‘까치소’ 또는 ‘작연(鵲淵)’이라 불리게 되었다.
한편, 신기리에는 오래된 반송이 한 그루 서 있었다. 나무는 나옹이 출가할 때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일화를 전한다. 지팡이를 바위 위에 거꾸로 꽂아 놓고 간 것이 자라서 거목(巨木)이 되었다는 것. 당시 출가자는 “이 지팡이가 살아 있으면 내가 살아 있는 것이고, 죽으면 나 또한 죽은 줄 알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전설의 나무는 7백여 년을 살다 고사하였는데, 나무가 죽은 자리에 사당을 짓고 선사의 초상화를 걸어 반송정(盤松亭)이라 이름 붙였다. 또 창수면에는 나옹이 창건한 것으로 알려지는 장육사(莊陸寺)가 있다.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佛國寺)의 말사이기도 한 장육사는 창건 이후 많은 수도승이 다녀가 수도도량으로 이름이 높았다. 조선 세종조에 산불로 당우가 전소되었던 것을 중창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장육사에는 1395년(태조 4) 태조와 왕비를 송축하기 위하여 지방 관리들이 중심이 되어 조성한 건칠보살좌상(乾漆菩薩坐像)[보물]이 봉안되어 있다.
[깨달음과 수행의 여정]
나옹의 어릴 때 이름은 원혜(元慧)였다. 나옹은 20세 되던 해 가까운 친구의 죽음을 보고 무상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 출가를 결심하였다. 그리고 산천을 주유하다가 학문이 높은 이를 만나면, “사람은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하고 물었다고 한다. 하지만 답답한 마음을 풀 길이 없자, 문경 공덕산 묘적암(妙寂庵)으로 가서 요연선사(了然禪師)의 문하로 출가하였다. 나옹을 만난 선사가 물었다. “무엇 때문에 중이 되려느냐?” 이에 나옹은 “삼계(三界)를 뛰어 넘어 중생을 이롭게 하고자 합니다.”라고 답한 것으로 알려진다.
출가해 혜근(慧勤)을 법명으로 받은 나옹은 운수납자가 되어 각지를 순력하였다. 그리고 25세가 되던 해 양주 회암사(檜巖寺)에 들어가 용맹정진하게 되었다. 그러기를 4년 여, 어느 날 눈이 쌓인 뜰을 거닐다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곧장 원나라에 가서 스승을 찾아 도를 구하였다. 그리하여 원의 수도에 있는 법원사(法源寺)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지공화상(指空和尙)을 만났다. 나옹이 원나라로 떠난 것은 당시 깨달은 승려가 선지식(善知識)에게 가서 인가를 받는 것이 강조되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다. 그러나 당시 고려는 원의 간섭에 따른 티베트 불교의 영향으로 대처승(帶妻僧)이 절반에 이를 만큼 불교계가 극히 세속화된 경향을 보이고 있었음을 감안하면, 만연된 불교계의 폐단을 일신하고자 하는 의도도 담겨 있었을 것이다.
이에 앞서 인도승 지공(指空)은 고려에 머물며 불교계에 희망을 불어넣은 적이 있었다. 지공은 마다가국 만왕의 왕자로 태어나 나란다사에서 율현에게 수학한 뒤 스리랑카의 보명존자에게 득도한 인물이었다. 이후 지공은 원나라를 거쳐 1326년 어향사(御香使)의 신분으로 고려에 와서 2년 7개월을 머물렀다. 머무는 동안 하루는 선(禪)을 설하고 하루는 계(戒)를 설하는 등 풍속을 일신시키고 선불교를 중흥시키는 데 기여한 바가 있었다. 고려의 백성들은 “석존(釋尊)이 다시 태어나 이곳에 도착하셨으니 어찌 뵙지 않겠는가”하며 “석가의 환생”이라며 추앙하였다고 한다.
나옹은 10년을 원에 머물면서 한동안 지공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어느 날 나옹은 게송을 지어 지공에게 올렸다.
"모르면 산이나 강이 경계가 되고/ 깨치면 티끌마다 바로 온몸이네/ 모름과 깨침을 모두 다 쳐부수었나니/ 닭은 아침마다 오경(五更)을 향해 우네"
지공은 나옹이 큰 그릇의 인물임을 알고 그를 판수(板首)로 삼았다. 판수는 지공 다음으로 절을 주관하는 자리를 의미하였다. 나옹 또한 지공으로부터 깊은 감화를 입고 수기(授記)를 받았다. 나옹이 귀국 후 회암사 중창에 공을 들이게 된 것은 연경의 법원사에서 받은 그 수기와도 관련이 깊었다. 당시 지공은 “고려로 돌아가 ‘삼산양수간(三山兩水間)에 머물면 불법이 크게 일어날 것”이라는 조언을 빠뜨리지 않았다.
원나라에서 유학하던 나옹은 그곳의 불교유적과 선승들을 참례하는 과정에서 강남 임제종의 18대인 평산처림(平山處林)[1279~1361]의 문하에도 이르렀다. 나옹은 처림의 도량에서 수 개월을 머물렀고, 마침내 처림에게 인가도 받았다. 평산이 그에게 준 게송(偈頌)[부처의 공덕이나 가르침을 찬탄하는 노래]이 전한다.
"법의와 불자를 지금 붙여 주노니/ 돌 가운데 집어낸 티 없는 옥일러라/ 계율이 항상 깨끗해 보리(菩提)를 얻었고/ 선정(禪定)의 슬기로운 광명 모두 갖추었네"
이로써 나옹은 유학을 통해 인도선과 중국선을 모두 인가받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나옹의 불교사상이 마조도일(馬祖道一)에서 유래한 조사선(祖師禪)의 경향과 일체의 권위나 차별적 요소를 배격한 임제선(臨濟禪)의 특징을 동시에 보여주는 이유다. 그리고 귀국 후 청규(淸規)를 통해 불교계를 일신하면서 성리학을 기반으로 새롭게 성장하던 지식인들이 불교를 배척하는 분위기를 떨치고자 노력하였다.
일찍이 회암사에서 4년간 정진하면서 간화선(看話禪)을 익힌 바 있는 나옹은 원에 유학해 집중한 선법 역시 이에 가까운 임제선이었다. 이를 통해 나옹은 세상의 법[世法]과 불법이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 것이 수행자가 찾아야 할 ‘본래진면목(本來眞面目)’임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현재 자신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 곧 정토라는 유심정토(唯心淨土)의 입장을 견지하였다.
귀국 후 나옹은 왕실의 귀의를 받아 해주 신광사 주지를 역임한다. 그리고 신돈과의 갈등으로 오대산에 은거하다가, 이듬해 스승 지공의 영골 사리가 고려에 도착한 시점[1370년 1월]을 계기로 오대산을 나와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하였다. 1370년 9월 초승과(超僧科)인 공부선(功夫選)을 주관하였고, 이듬해에는 동방제일도량인 송광사(松廣寺) 주지에 취임하였다. 이즈음 나옹의 관심은 온통 고려의 불교 전통을 재확립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전국적인 모금 활동을 통해 회암사를 다시 일으키고자 한 것도 그 일환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불교 배척의 파도를 넘고자]
회암사는 현재 경기도 양주시 천보산(天寶山) 자락에 그 터가 남아 있다. 이곳은 귀국 후 나옹의 행적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사찰은 이전에 작은 사찰이었던 것을 지공(指空)이 중창을 계획한 바 있었고, 제자인 나옹에 의해 본격적인 불사가 이루어졌다. 중창 회향(回向)된 당시의 모습을 목은 이색은 「천보산회암사수조기(天寶山檜岩寺修造記)」에 상세히 적었다. 이에 따르면 사찰은 아름답기가 나라에서 첫째라 하고, ‘중국에서도 많이 볼 수 없는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최근 발굴 조사를 통해 밝혀진 가람은 그 규모도 놀랍지만 흥미로운 유구가 다수 확인되었다. 이러한 사찰의 규모와 형태는 나옹이 “지공 스님이 회암사의 지세가 천축의 날란다사원[那爛陀寺院, 나란타사원]과 같다고 말해 이곳에 창건하게 된 것”이라는 언설을 떠올리게 한다. 여기에 이르면 회암사가 인도의 날란다사원을 본떠서 건립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상상에 이른다.
날란다사원은 인도 동북부에 자리 잡고 있는 종교와 학문의 요람이었다. 이미 2세기말에 교육의 공간을 갖춘 사원으로 출발하였는데, 631년 날란다사원을 찾았던 당나라 고승 현장(玄奘)은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를 통하여 상주하는 승려가 1만 명, 교수가 2천 명에 달한다고 기록하였다. 기록을 통해 지공은 그곳에서 수학한 최후의 졸업생은 아닌가 하여 그의 수기를 받아 중창된 회암사가 날란다사원의 후신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나옹은 이 불사를 통해 고려의 불교 전통을 되살리기 위한 교육의 도량으로 삼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
회암사는 나옹이 득도한 사찰이었을 뿐만 아니라, 은사인 지공이 한때 머물렀던 곳으로, 나옹에게는 매우 특별한 인연이 있던 곳이었다. 나옹은 불사를 위해 송광사를 비롯한 여러 사원을 유력해 비용을 마련하고, 1374년 봄에 착수해 1376년 4월 낙성을 보게 되었다. 모두 262칸으로 웅장하고 미려하기가 ‘동국(東國)에서는 제일’이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낙성에 앞서 개최된 문수회(文殊會)에 서울과 지방의 남녀들이 운집하여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이는 결국 나옹이 절의 낙성을 보지 못하고 쫓겨나는 빌미가 되었다. 급기야 대간들의 상소가 빗발치는 가운데, 나옹은 경상남도 밀양 영원사(瑩原寺)로 추방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나옹은 밀양으로 가는 도중 경기도 여주 신륵사(神勒寺)에서 입적하였다.
[법통과 문도들]
나옹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중들의 추모 물결이 이어졌다. 전국의 불자들이 운집하는 회암사 낙성의 극적인 장면을 앞에 두고, 성리학으로 무장한 신진 사류들에 의해 배척을 당한 결과였다. 급작스러운 나옹의 입적은 또 많은 의문을 불러왔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또 나옹에 대한 애도의 심경을 더욱 상승시켰을 것이다. 신륵사에 세워진 「신륵사보제선사사리석종비(神勒寺普濟禪寺舍利石鐘碑)」에는 당시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한다.
“무릇 나옹의 사리는 사방으로 흩어져 혹 구름과 안개 덮인 산속, 혹 세속의 여염집과 신도들의 집에도 있다. 혹 머리에 받들고 가거나, 그를 받들어 모시는 사람이 그가 살아 있을 때 보다 백배 이상 많았다”
실제 입적한 후 나옹의 사리는 온 나라에 퍼져서 봉안되었다. 또 진영을 모시고 공양하는 곳도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이는 나옹이 생존해 있을 때 못지않게 나옹의 죽음이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나옹의 제자들은 스승이 입적한 후 고려 말~조선 초 왕조 교체의 와중에서 한국선불교의 전통을 이었다. 대표적으로 고려 말의 국사 환암(幻菴)과 조선 초 왕사 무학(無學)이 있다. 환암은 법명이 혼수(混修)로 1344년 선시(禪試)에서 상상과에 올랐고, 1370년(공민왕 19) 공부선(功夫禪)에서 명성을 떨친 인물이었다. 당시 모든 종파를 망라했던 승과에서 탁월한 식견으로 국왕을 만족시킨 환암은 왕이 가까이 두려고 하자 위봉산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기도 하였다. 54세 때에는 내불당(內佛堂)을 맡아달라는 왕명을 피하여 영덕의 평해에 은둔하기도 하였다.
자초(自超)[1327~1405]는 조선 태조에 의해 왕사로 책봉되어 묘엄존자(妙嚴尊者)로 불리기도 하며, 무학대사로 더 알려진 인물이다. 18세에 출가한 자초는 진천 길상사(吉祥寺), 묘향산 금강굴(金剛窟) 등에서 수행하였으며, 연경에 가서 지공과 나옹의 가르침을 받고 귀국해 천성산 원효암(元曉庵)에 머물렀다. 자초는 나옹에게서 가르침을 받았을 뿐 아니라 수서(手書)와 시, 의발을 받았으며 회암사 낙성법회에서 수좌로 추대되었다. 스승이 입적하자 왕사의 책봉을 사양하고 세상에 알려지기조차 꺼리면서 철저한 나옹의 계승자임을 보여주었다. 1392년에 왕사(王師)가 되어 경기도 양주 회암사에 머물렀으며, 금강산 금장암(金藏庵)에서 입적하였다.
[삶을 비추는 선시]
나옹은 고려 말 변혁기를 살면서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20세에 출가해 8년 간의 국내 수학으로 깨달음을 얻었고, 10년 동안 원나라를 유력하면서 인도 출신의 고승 지공을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 귀국 후에는 고려의 불교 전통을 회복하고자 노력하였다. 문인들은 나옹의 저술을 엮어 『나옹화상어록(懶翁和尙語錄)』과 『나옹화상가송(懶翁和尙歌頌)』으로 전해지게 하였다.
좋은 시(詩)를 읽으면 피가 맑아진다고 한다. 불가에서는 양식 가운데 조촐하면서도 향기로운 양식이 시라고도 하였다. 나옹은 많은 선시를 남겨 뒤에 오는 사람들이 자신의 득도 경험과 도의 경지를 맛보게 해준다. 오늘날 전해오는 나옹의 선시들은 누구나 그러한 삶의 향기를 머금을 수 있게 한다. 나옹의 작품으로 알려지는 「청산가」와 함께 「백납가(百納歌)」는 그래서 또 선승 나옹의 초상과 함께 전하는 양식인지 모른다.
"세상을 돌아다니며 무엇을 얻었던가?/ 내가 배운 것은 오로지 가난뿐/ 명예와 이익 다 부질없는 것/ 누더기 가슴 비었거니 무슨 생각 두랴/ 한 바리때의 삶 어디를 가나 넉넉해"